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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거리 / 원도이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5-10-10 오후 12: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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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거리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
벽도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 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
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
입속에서도 토마토는 자랍니다
줄기는 벽을 타고 오를까요 우리는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상관없습니다 벽은 토마토를 알지 못합니다
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걸 씨앗은 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
씨앗도 붉다는 걸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입니다
어느 오후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기분에 따라 흘러 다닙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과 토마토에서 둥글게 떨어져 내리는 기분은 다를까요
담벼락 아래 토마토 한 주를 심어볼까요
토마토가 자랄 때마다 누군가는 담벼락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토마토를 삶읍시다 아니, 쌓읍시다
토마토 상자에 탄탄한 토마토부터 쌓으며
우리는 잠시 토마토로 쌓은 거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제9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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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시적 대상은 아주 이질적인 두 대상이다. 하나는 ‘벽’이고, 하나는 ‘토마토’이다. 두 대상은 서로 대척점에 놓인 시어들이다. ‘벽’의 이미지는 단단하고 ‘토마토’의 이미지는 말랑말랑하다. ‘벽’은 자라지 않으나 ‘토마토’는 자란다. 시인은 이 이질적인 두 시어의 상징성을 추출하여 이에 우리 사회의 모습이나 우리 인간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다.
1연에서 시인은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이라고 선언한다. 벽은 벽돌로 쌓은 것인데, ‘벽을 쌓을 것이 아니라 벽을 삶자고 한다.’ 그것도 토마토처럼 삶으면 ‘벽도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라고 한다. 굳은 벽, 단절의 벽, 타자를 배척하는 벽이 아니라, 토마토처럼 말랑말랑해져 타자의 입에 들어가 온전히 타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 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라고 가정하고 난 뒤, 가족은 ‘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라고 화해의 시간을 꿈꾼다.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로 벽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토처럼 존재해야함을 넌지시 읊고 있다. 3연에서는 그러면 서로 토마토가 되어 서로의 입속에서 토마토로 자란다고 한다. 서로의 벽을 타고 오를 수 있다고 한다. ‘토마토가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걸 씨앗은 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씨앗도 붉다는 걸’ 벽은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이라고 시의 화자는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얼마든지 벽과 토마토는 가까이 할 수 있음의 여지를 준다. ‘담벼락 아래 토마토 한 주를 심어볼까요/토마토가 자랄 때마다 누군가는 담벼락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벽은 쌓는 것이 아니라 삶아야 하고, 토마토는 삶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라는 아이러니 의식이 필요함을 말한다. 벽’의 틀 속에서는 ‘벽’이 ‘토마토’가 될 수 없으며, ‘토마토’의 틀 속에서는 또한 ‘벽’이 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아가려는 열림의 세계가 필요함을 이 시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렇듯 시적 사고는 의식의 전환 속에서 시적 생명성이 탄생한다. 이제부터 ‘벽을 삶읍시다’ 그리고 ‘토마토를 쌓읍시다’. 그러면 이 굳은 거리가, 이 단단한 벽들의 세상이, 말랑말랑한 ‘토마토 거리’로 재탄생할지....(*)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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