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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박노해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4-03-09 오전 10:26:29

새
박노해
접견을 마치고 돌아와/철커덩, 문 닫힌 독방 찬 벽에/머리를 기대고 우두커니/창살 너머 손바닥만 한/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워 그리워/새처럼 날고픈/자유가 그리워
누군가 식구통으로 뭔가를 들이민다/천천히 고개 돌려 수건을 펼쳐본다/어린 새 한 마리/외로운 독방에서 벗하라고/창가에 날아온 새를 잡아서/날개 깃을 잘라 보낸/혼거방 수인들의 마음씨
어린 새는 미약하게 울고 있다/날 수 없는 짧은 날갯짓으로/작은 병아리처럼 울고 있다/어린 새와 나는 독방에 갇혀/함께 물을 먹고 함께 밥을 먹고/함께 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그는 잘린 날개를 키우고/나는 생각의 날개를 키웠다
행복했다/관 속 같은 독방에서/째째거리며/날 반기는 생명이 있다는 것
시월이 되자 어린 새가 파르르 난다/무릎에서 머리까지/식구통에서 뺑끼통까지/비좁은 독방을 더 좁게 날며 운다
깃털을 잘라야 해요/날아가고 말 거예요
널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새벽 여명이 밝아 올 때까지/격렬한 아픔으로 부딪친다
창살에 아침 해가 비친다/어느 아침처럼 물을 함께 마시고/밥을 함께 먹고 나는 너를/가라, 창살 밖으로 날려 보낸다
어린 새는 처음으로 하늘을 날다 돌아와/몇 번이고 서툰 날갯짓으로 다시 돌아와/내 어린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뭉클한 것이 솟구친다
날아라 너의 하늘을/저 푸른 자유의 하늘을/너를 가두는 순간 나는 스스로/감옥 속에 영원히 갇히는 것
내게 길들여진 너는/푸른 하늘을 날지 못하는 너는/자유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너는/더 이상 나의 새가 될 수 없으니
가라, 너의 거친 길로/야생의 날갯짓이 나와 함께 사는 것이니
어린 새는 몇 번이고 돌아와/날개 잘린 내 어깨 위에서 울부짖다/마침내 육중한 옥담을 넘어 날아간다/내 안의 팽팽한 줄이 끊어진 듯/나는 그만 스르르 찬 바닥에 무너진다
날아라/날아라/새여
날자 날아서/우리 다시 만나자/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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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의 「새」를 읽고 있으면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 먹먹함이랄까? 처연함이랄까? 숙연함이랄까? 그 아득한 인간의 운명 앞에 침잠하게 된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시인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 나오는 한 편의 시다. 그의 옥중 독방생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날개 잘린 새와 ‘함께 물을 먹고 함께 밥을 먹고/함께 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 생활한다. 자유의 억압은 외로움과 고독으로 내몬다. 그러다가 만난 새와의 동거는 구원자와 다름없었으리라. ‘행복했다/관 속 같은 독방에서/째째거리며/날 반기는 생명이 있다는 것’ 그러나 화자는 깃털이 자란 날개의 새를 날려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날아라 너의 하늘을/저 푸른 자유의 하늘을/너를 가두는 순간 나는 스스로/감옥 속에 영원히 갇히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새를 가두는 순간 자신이 스스로 감옥 속에 영원히 갇힌다는 생각은 새와 함께 생활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잘린 날개를 키우고/나는 생각의 날개를 키웠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새를 날려 보내는 일은 아픔이지만 또한 나를 날려 보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에 이른 것이다. 만약에 ‘내게 길들여진 너’가 ‘푸른 하늘을 날지 못하는 너’가 되어 ‘자유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너’가 된다면 ‘더 이상 나의 새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창공을 향해 자유롭게 비상하는 너야말로 참다운 나의 새가 된다는 구절에 이르면, 얼마나 그가 삶에 천착하고 궁구했는지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박노해 시인의 삶의 진실성, 진정성에 이르게 하는 작품이다. 편집하지 않은 본디의 시 형태대로 다신 이 구절을 읽어본다.(*)
내게 길들여진 너는
푸른 하늘을 날지 못하는 너는
자유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너는
더 이상 나의 새가 될 수 없으니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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