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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숲길에서 / 고재종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3-03-04 오전 8:58:43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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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통째로 한 연으로 된 것을 이해하기 쉽게 5연으로 나누어 읽어봅니다.
1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누이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이는 초롱초롱 빛나고 또렷한 말을 지닌 그 옛날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처럼 지금 누이의 삶이 동백꽃처럼 벙글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지금은 헤어져 있지만 누이만 생각하면 그 붉고 아름다운 동백꽃이 떠오른다는 의미이겠지요.
2연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은 죄 깊은 생각으로 산 삶이니, 내가 딛는 나의 길에는 동백꽃이 몽글몽글 맺히는 게 아니라, 모감모감(모감:달아 없어짐) 통째로 떨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겠지요. 얼어붙은 동백꽃 같은 나의 삶은 나를 세차게 후리친다고 하였으니, 나의 삶의 현재의 힘든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이를 멀리 둔 그리움에 대한 아픔인 것 같습니다.
3연에서는 누이가 걸어간 삶의 고결함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너’가 떠난 이곳은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는 세상이고, 나는 마음속 서러움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너는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라고 묻고 있으니 일말의 기대감과 너는 너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받아들이는 갈림길에 내내 서 있음을 봅니다.
4연에서는 자신의 티끌 같은 이러한 마음에 대한 조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는 아랑곳없이 동박새는 그저 ‘동박새 소리로만 울어’댈 뿐입니다. 아상我相에 젖어 울어보지만 세상은 무상無相으로 답을 할 뿐이라서, 이제 자신의 ‘애진 마음을 저 바람으로 은물결로 그예 씻어 보’려 합니다.
5연에서는 혼탁한 영혼을 일깨워 무명한 삶을 들여다봅니다. 절간에서 울리는 저녁 범종소리에 삼라만상은 모두 자신에게로 눈귀를 돌립니다. 너와 나 역시 그 동안 쇠가 든 영혼을 내려놓고 침잠하며 무명無明한 삶을 바라봅니다. ‘쇠’가 철, 쇠붙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상징적으로 ‘속세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만, ‘쇠’가 남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있으니, ‘자기 아집에 사로잡힘’의 뜻으로 이해됨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아상을 지으면 아집에 사로잡혀 무상한 세상을 못보고, 오직 무명함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무명無明은 불교에서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함이니, 그저 피고 지는 동백꽃을 바라보는 혜안을 지닐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6연에서는 그래도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는 아쉬움을 노래합니다. 다 내려놓아야 함에도 시적 화자은 끝내 내려놓지 못합니다. 동백꽃은 때가 되면 피고 지는 이 무상의 세계에, 무슨 그리움의 꽃을 피우려고 하지 말아야 함에도, 시의 화자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라고 노래한 것으로 보아 사랑하는 누이와 걸어보고자 합니다.
원시인님, 이것이 인간 존재의 속성인가요? 아, 아득한 바다 위를 걷는 바람이여, 그 가이 없는 발꿈치로 연꽃을 피우고 동백꽃을 피우고 지운들, 이 중생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꽃은 누가 잠재울 것인지 저녁 예불 범종소리는 저 혼자 울어댑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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