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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 최찬상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0-03-21 오전 9:35:28

반가사유상
최찬상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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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수만 마디의 절절한 수식보다 단순하고 명쾌하면서도 근원적인 것에 가 닿을 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최찬상 시인의 「반가사유상」을 대하고 있으면 이러한 언어예술의 신비에 젖습니다.
시인은 어느 날 철로 된 ‘반가사유상’을 대합니다. 녹이 슬고 같은 자세로만 천 년을 견뎌온 반가사유상 앞에서 그는 반가사유상 못지않은 사유의 숲을 걷고 있습니다. 저 녹이 슨 반가사유상 속에 부처는 존재하고 있을까? ‘면벽한 자세만/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서 부처를 재발견합니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세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존재의 가장 축약된 본질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모두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 있으며 기억됩니다. 특히 그 이미지는 타자에게 생각을 소생시키므로 소멸된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지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반사사유상의 미소만큼이나 조용하게-‘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그렇습니다. 부처의 존재는 그 안에 있고 없음에 매달리는 존재가 아니지요. 무소유의 모습이야말로 부처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연에 가서 그의 사유는 저 광활한 벌판을 달리는 바람처럼 자유로우면서도 그 어느 모퉁이에서 생명을 틔우는 이슬처럼 빛을 발합니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흘러내린’ ‘녹물’을 ‘흘러내린 녹물’로 치환시키면서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반짝이겠다’라는 것은 사유의 절창입니다.
이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곁에 이 ‘반가사유상’을 두고 재조명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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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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