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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쓰는 왕희지체 / 손택수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7-12-20 오전 9:30:03

▲ 그림 김수영
물로 쓰는 왕희지체
손택수
먹물인가 했더니 맹물이다
소흥 왕희지 사당 앞
노인은 길바닥에 논어 한 구절을
옮겨놓고 있다
페트병에 꽂은 붓으로
한 자 한 자 그어 내리는 획이
왕희지체 틀림없다
앞선 글자들이 지워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그저 그어 내리는 순간들에만
집중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쓰는 글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글도 있구나
드러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지워져 가는,
소멸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글씨체
스치는 붓으로 바닥을 닦는다
쓰고 지워지길 골백번
붓을 밀걸레 삼아
땡볕에 달아오른 바닥의 열기를 식히며
날아오르는 왕희지체
원시인님, 붓글씨를 써 보셨나요? 먹을 갈아 그 먹물을 찍어 하얀 종이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갈 때의 기분은 첫사랑의 설렘 같은 것이 있었지요. 하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점점이 남겨지는 자신의 흔적들, 그 발자국은 추억이고 자신의 삶의 궤적이 된 듯도 합니다.
손택수 시인의 ‘물로 쓰는 왕희지체’는 중국 소흥에서 한 노인이 길바닥에다 물로써 붓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쓴 시인데, 삶에 대한 통찰력과 승화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지 시입니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쉽게 접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시인은 이 범상한 노인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새로움을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맹물로 쓰는 붓글씨. 쓰자마자 사라지는 글씨를 노인은 써 내려갑니다. 앞선 글자들이 사라지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쓰는 현재에만 충실한 삶을 시인은 보았습니다. 어쩌면 삶이란 과거도 미래도 없지요. 이 순간, 이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현재를 살라)이라고 역설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삶에 대한 통찰력은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쓰는 글이 있다면/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글도 있구나’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문자로 그 역사를 남겨두고자 애쓰지만, 이 노인은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삶을 살아가는 것의 참다움을 역설적으로 시인은 간파하고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부패의 힘’이라는 시에서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안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썩을 수 있는 것은 참 생명의 길이지만, 썩지 않는 것은 영원한 죽음 밖에 없겠지요. 부패는 역설적으로 삶의 한 방식인 것과 같이 사라지는 글자는 바로 우리 삶의 참다운 한 방식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정 이 세상 모든 것은 소멸을 통해서 마지막 완성을 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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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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