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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 백석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1-10-23 오전 8:22:23

고향
백석
나는 북관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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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고향」이라는 시를 읽으면 고향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직접적으로 전달받기보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는 느낌입니다. 서사가 있는 풍경, 그 풍경 속에 서정이 푹 녹아있는 아름다운 고향을 만날 수 있어 좋습니다.
시라고 하기보다 한 편의 짧은 수필을 대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또 사연을 시시콜콜 다 얘기해 주지는 않습니다. 행간과 행간 사이 시어가 빚는 함축성과 여백의 아름다움을 잔잔히 느끼게 해 줍니다. 시의 화자는 몸이 좋지 않아 의원을 불렀는데 그 의원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석가여래처럼 자비롭고 관우처럼 긴 수염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맥을 짚고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눕니다. 그 가운데 ‘아무개’씨라는 사람을 통해 서로 끈끈한 정을 느끼게 되고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 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간단한 대화의 내용을 자근자근 풀어놓은 실타래를 통해 어느새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소중함 등을 느끼게 합니다.
참 편안한 시입니다. 몸의 병에 대한 치료 이야기는 더 없습니다. 약도 짓는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저 고향과 고향에 관련된 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벌써 병이 다 나은 듯합니다.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라는 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고향의 세계로 잔잔히 그리고 고요히 이끌어 줍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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