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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비전과 본질을 생각한다
[편집위원 칼럼] 영화로 풀어보는 교육이야기(3)

기사입력 2018-04-14 오전 9:12:04

  전종대

  무학중 교사, 시인

  경산인터넷뉴스 편집위원






<관상>과 조화의 미학

 

이번에는 2013년에 나온 한재림 감독의 영화 <관상>이다. <관상>은 조선시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의 역사적 사건을 밑바탕으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오묘함과 풀리지 않는 신비함, 뜨거운 부성애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불의에 대한 정의 등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 <관상>은 조선시대 최고의 관상가 김내경이라는 인물의 일대기적 삶의 이야기다. 그의 집안은 양반 가문이었지만 더 이상 관계(官界)로 나아갈 수 없는 역적의 집안이었다. 그리하여 그(내경)는 멸문당하고 남은 아들 진형과 처남 팽헌을 데리고 산골짜기에서 붓이나 팔아 숨어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는데 한 눈에 사람의 관상을 보고 그 사람의 앞날을 알아맞히는 신비한 재주를 가졌다. 그러나 아들 진형은 그런 것에 매여 있는 아버지가 못마땅했고 자신은 할아버지가 다 못 이룬 벼슬의 꿈을 위해 결국 집을 떠난다. ‘내경은 한양에서 내려온 기생 연홍의 제의로 돈을 벌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 관상을 보고 용한 관상쟁이로 한양 바닥에 소문이 더욱 나기 시작한다. ‘내경김종서로부터 사헌부를 도와 인재를 등용하라는 명을 받아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아들 진형은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고 조정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그런 가운데 내경수양대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함께 일을 도모하는데 동참하자는 제의를 받지만 아들과의 재회에서 아들이 바르고 옳은 길을 가겠다는 의지에 힘입어 김종서쪽에 서게 된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수양대군한명회를 통해 내경의 아들 진형의 눈을 멀게 하고 그 짓이 김종서가 한 짓으로 오해 하게 만든다. 그로 인해 김종서쪽에서 먼저 수양대군을 치려는 계획을 처남 팽헌이 그날 밤 수양대군에게 고자질 하고 모든 일은 뒤틀리게 된다. ‘김종서도 죽고 가담했던 모든 신하들이 참수되며 끝내 아들까지 수양대군이 쏜 화살에 죽는다. 그는 목숨만을 부지한 채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닷가에 와서 낚시나 하며 말년을 보낸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교육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영화의 한 주제이기도 한 정의와 불의의 굴레 속에 갈등하는 한 인간의 모습과 선택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이 있었지만, ‘김내경의 최대의 갈등은 김종서편에 설 것인가? ‘수양대군편에 설 것인가? 였다. ‘김종서는 선왕인 문종의 명을 받고 어린 왕 단종을 지키려는 정의와 명예의 상징인데 반해, ‘수양대군은 어린 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권모술수와 불의의 상징이다. 이 두 세력 사이에 낀 김내경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 ‘수양대군의 편에 섰더라면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올바른 삶에 대한 의지에 감동받아 그 역시 옳은 길을 선택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들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이었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정의와 불의는 거창한 국가적 차원에서만 주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사소한 일들에서 다반사로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다 본 후 이 문제를 학생들에게 토론으로 부쳐보면 의외로 수양대군쪽에 서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이는 아이들이 그만큼 현실적이며 출세 지향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다. 명분과 실리 앞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보는 것은 잘못일 수도 있지만, 이는 실리에 앞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하는 것에 눈과 귀를 가리고 오직 자신의 영달과 이익에만 눈이 먼 사회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오직 경쟁만 부추기는 사회와 교육계의 영향도 없지 않다. 경쟁 앞에 남을 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교육은 장자가 말한 메추라기가 아닌 대붕을 키워야 한다. 자신의 영달과 편안함만을 추구하여 행복을 구가하는 메추라기가 아니라, 멀리 보고 크게 보아 우리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위해 큰 그릇의 교육이 필요한 때이다. 자기 스스로 떳떳하며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이 많아질 때 분명 그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된다. 영리하고 우수한 아이들일수록 더욱 이 문제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그만큼 사회에 나아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영화의 본질적 주제이기도 한 관상(觀相)의 문제이다. ‘관상이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나 운명 따위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관상으로 앞일을 판단할 수 있느냐? 또는 관상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느냐?’의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삶이 어떤 것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고 인간의 의지에 의해 바뀔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는 더욱 관심이 지대하였을 것이고 운명론 쪽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지만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의 궁금증이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주인공 김내경은 아들이 벼슬길에 나아가고자 할 때 나아가지 못하게 말린다. 이는 아버지의 벼슬길에서 겪은 역모의 사건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주된 것은 아들의 관상을 본 결과 과거 길에 나가 벼슬을 하더라도 끝이 좋지 않을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처남 팽헌이 화를 잘 낼 때 너는 목젖이 튀어나와 언젠가 그 목젖으로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김종서의 사전 거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일러바친 팽헌에 의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엔 또 한 번 멸문지화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자신의 관상을 보고 늦게 좀 좋을 팔자가 된다고 믿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벼슬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살인 사건이 있을 때 혐의자 3명의 관상을 보고 이 중에는 살인자가 없다 하면서 죽은 부인의 남편을 살인자로 지목하고 자백을 받아 내는 것 등의 많은 사건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의 사건으로 들고 있다.

 

한편 수양대군김내경이에게 자신의 관상이 왕이 될 관상인가를 봐 달라는 대답에는 끝내 입을 다물고 명확한 답을 하지 않는다. 이는 암묵적으로 수양대군의 관상이 왕이 될 관상이 아님을 보았지만 차마 그 앞에서 그 말을 하지 못한 상황으로 읽힌다. 후에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수양대군이 왕이 될 관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때의 대답은 진실한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는 수양대군이 왕이 될 관상이 아니었음에도 어떤 변화에 의해 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작가는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수양대군은 주어진 운명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전자와 후자의 상반된 관점에서 이 영화는 서로 긴장관계를 끝까지 유지하지만 결코 쉽게 결론으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이쪽인가 싶으면 저쪽으로 움직여가고 저쪽인가 싶으면 이쪽으로 사건을 만들어가는 묘미가 대단하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거사는 실패하고 아들은 죽고 목숨만을 부지한 채 처남과 함께 세상을 뒤로 한 채 바닷가에 와서 낚시나 하고 지낼 때,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김내경의 재주를 아까워하며 다시 조정으로 가서 일하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그날 거사를 일으킨 사람들의 면면을 낱낱이 보았을 터인데 그 관상을 기록해 두었소?”라는 한명회의 말에 그는 그냥 수양은 왕이 될 상이었단 말이오. 난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화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라는 명대사를 던진다. 여기서 사람의 얼굴파도이고 관상을 지칭한다면, ‘시대의 모습바람이고 관상을 만드는 근본적인 동인(動因)을 지칭한다. 근본적인 동인은 바람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배를 움직이는 물살처럼 흐르는 것이고 유동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 마지막 김내경의 대사는 비유적으로 처리하여 모호한 점은 있지만 우리의 관상 이전의 세계를 간과한 것임을 스스로 자인한다. 관상 이전의 세계가 근본적인 신비의 우주적 흐름인지? 아니면 인간의 의지까지 포함한 시대적 흐름인지?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관상가 김내경역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확신한다면 굳이 어느 편에 들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지 않는 것인가? 또한 기생집에서 한 기생에게 뺨에 수박씨를 붙여 주고 난 뒤 그 자리에 수박씨만한 점을 만들었고 그 후 인기 좋은 기생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관상을 옹호하면서도 관상 역시 인간이 만들어가는 의지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묘한 두 영역의 경계선에서 작가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한 것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김내경이 사헌부의 부탁으로 살인자를 찾기 위해 갔을 때, 세 명의 혐의자가 아닌 죽은 부인의 남편을 살인자로 지목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남편의 관상과 부인의 관상을 통해 밝힌다. 부인 역시 요절할 상이 아닌 부귀를 누릴 상으로 나왔으면서도 이렇게 일찍 죽은 이유는 남편의 관상과 서로 상극을 이루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서로의 상이 개별적으로 좋았으나 족제비와 닭의 상을 지닌 존재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이러한 경지에까지 갔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상 자체가 좋고 나쁨이 있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상과 상의 만남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이 있는가 하면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의 상이 있다는 것이다. 우주 만물이 서로 상생하기 위해서는 서로 어울리고 조화로워야 한다는 원리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양대군의 상이 그 당시의 바람과 더 잘 어울리는 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김내경수양은 왕이 될 상이었단 말이오.’라고 하지 않고, ‘그냥 수양은 왕이 될 상이었단 말이오.’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육적 덕목을 이 영화를 통해 찾아 볼 수 있겠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의 개별적 존재이며 하나의 우주이다. 이러한 개별적 존재들은 누구 하나 똑같은 존재가 없으며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존재자들이다. 이는 각자의 개별적 관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별적 존재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회는 하나의 숲이며 이 숲에 모여 함께 살아갈 때 서로의 개별적 속성들이 조화를 이룰 때는 평화가 오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서로를 누르거나 눌리거나 죽거나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를 위해 매진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특성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맞는 적합성의 교육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수많은 특성이 있다는 것이고 수많은 특성이 있다는 것은 수많은 개별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특성을 찾아 가장 잘 어울리는 것과 결합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럴 때 좋은 관상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요절하지 않은 부인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살인하는 남편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의 학생의 개성과 특성 파악 그리고 그에 맞는 진로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영화 <관상>운명과 의지라는 두 대립의 세계를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조화와 상생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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