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칼럼&사설
마음이 허기질 때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은빛수녀의 사색노트]
기사입력 2019-08-23 오전 9:54:37

최근 열흘이 넘도록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거의 보지 않았다. 내가 대단한 결심을 해서가 아니다. 그 조금의 틈도 나지 않을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새로운 업무에 말 그대로 쫓겨 지내고 있다. 여유와 쉼이 목말랐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책도 읽고 싶고 성당에 홀로 앉아 조용히 기도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달콤한 여유가 찾아왔다. 그런데 정작 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자,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뉴스를 검색하며 인터넷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소중한 여가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다. 눈과 머리는 더 피곤해지고, 마음은 허망하고 우울하기까지 했다. 나는 바보인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 평소 그렇게 원하던 것을 하지 않고 왜 허겁지겁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었을까?
어떤 사람이 말하길, 어린 시절에 자기가 친밀감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가는 어른들에게 늘 먼저 말을 걸었고 심지어 목욕탕을 가는 어르신께 “나도 데려가 주세요”라며 함께 가기도 했단다. 어떤 날은 아예 거리의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과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단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단다. 자신이 친화력이 뛰어나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님을. 어린아이의 그 행동들은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제발 나 좀 봐주세요’ 라는 아우성 이었음을. 엄마가 바빠서 늘 혼자였던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로 인해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그렇게 멈출 수 없는 산만함으로 표출했던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이 아이의 모습에 나 자신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대상관계이론의 영국학파의 대표적 심리학자 로널드 페어베언(W.Ronald D. Fairvairn)은 ‘인간은 대상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한다. 아이는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어떤 대상을 찾아 나선다. 슬프고 외롭고 우울한 감정을 마주하기에는 자아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직면하고 달래주기가 부담스럽고 버거워서 외부의 어떤 대상을 찾아 해매는 것이다.
그런데 비단 아이만 그럴까? 며칠 동안 너무 바쁘게 지내면서 나는 마음도 몸도 모두 지쳐 고갈되어 있었다. 멈추지 않고 쉬지 못한 만큼,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 만큼, 그만큼 공허와 외로움과 우울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안의 그 공허와 외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하고 활동하는 중에는 외부적 요소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활동이 멈춰지면 마치 앵글이 바뀌듯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내 안의 것들이 클로즈업되면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토록 바라던 여가 시간,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추게 되자 내 안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과 공허함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외로움을 직면하고 달래주지 않고 인터넷 공간을 헤매며 내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쳤다.
나는 왜 그랬을까?
‘아, 나는 외로움을 본능적으로 멀리하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 외로움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자꾸 무언가를 끌어들이는구나. 외로움이 그만큼 두렵구나.
어쩌면 우리는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외로움이 새어 나올 틈만 생겨도 누군가에, 무언가에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온종일 열심히 일하고 방에 돌아왔을 때, 딱히 할 일이 없고 심심할 때,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업무에 시달리다 한숨 돌리는 그 잠깐에도 미세한 ‘틈’사이에서 치고 올라오는 마음속 외로움.
그 외로움은 우리의 또 다른 본능적 욕구를 불러온다. 이런 나를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이런 나를 무언가 채워주었으면 하는 사랑에 대한 욕구 말이다. 그리고 이럴 때, 스마트폰은 그 누군가, 그 무언가가 되어준다. 조건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는 외로운 마음 속 아이를 스마트폰으로 달래고 있는 것은 아닐까……
.jpg)
편집/최상룡(ksinews@hanmail.net)


.jpg)
.p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