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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은 어떻게 ‘사랑’을 만드는가
[은빛수녀의 사색노트]
기사입력 2017-10-31 오후 4:02:04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면 불행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자기만족에 빠진 ‘나’홀로 사랑, 책임 없는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사랑에 빠져들고 있다.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 안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진실을 만나기보다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환상을 꿈꾸며 자기욕망을 채운다. 그리곤 책임지지 않는 연애, 결혼하지 않는 연애 그리고 ‘썸’만 타는 연애가 좋다고 한다.
이러한 가짜 포만감에는 결국 더 큰 고독과 좌절이 따른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수고하는 자기극복과 절제이다”라고 은빛수녀는 말한다.
그렇다.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어지간한 지식은 다 알 수 있고, 손쉽게 재미와 쾌락에 빠져들 수 있지만 진실로 사랑과 행복에 이르는 길은 내면으로의 깊은‘자기성찰’이다.
그 길로 가는 출발이‘검색’에서 ‘사색’으로 돌아섬이 아닐까...

자기만족에 빠진 ‘나’홀로 사랑
십대 소녀들이 빠져 있는 팬픽(팬픽Fanfic’ 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켜 자기만의 취향과 욕구를 표현하는 가상의 사랑이야기다. 십대들이 대중스타에 열광하는 것은 발달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바라보기만 했던 스타에 대한 욕망을 인터넷을 통해 팬픽을 만들어냈다는데 의미는 있다. 하지만 아무런 여과과정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많은 팬픽들이 지나치게 엽기적이고 자극적이며 에로틱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이런 팬픽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십대의 정신과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다.
물론 아날로그 세대도 로맨스소설을 접하면서 사랑이란 것을 배워왔다. 하지만 문학은 완결된 구조 안에서 작가와 독자와의 상상력으로 역경과 고난을 주인공과 함께 헤쳐 나간다. 무엇보다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 안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진실을 만난다. 그 안에서 책임과 양심을 배우며 이타적인 마음을 키워가기도 한다. 그런데 팬픽은 스타라는 실재인물을 등장시킴으로 캐릭터에 대한 다양하고 열린 상상보다는 환상에 가까운 허구로 자신을 투사하는데 몰입하게 한다. 좋아하는 대상을 감각적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의 과잉욕망 안에 빠져 자기만족감을 채운다. 상상보다는 환상을 꿈꾸고 역경과 고난보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안주하는 세상에 ‘나’만 남는다. 가상의 세상도 현실과 똑같이 우리를 교육시키는 환경이기에 그렇다.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사랑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한동안 청춘남녀들이 열광했던 ‘썸’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반복 어구다.(‘썸’이란 ‘썸띵(Something)'의 준말. 연애직전의 연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썸탄다‘고 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이 썸 권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으며 ‘썸’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고 한탄한다.
‘썸’ 탄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썸타는 애매한 관계에는 책임이 없다. 깊은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한 갈등을 피할 수 있다. 또한 직접 상대를 만나 수고롭게 관계 관리에 애쓰기보다 SNS만으로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 간만 보며 밀고 당기는 것이 오히려 더 즐겁다는 젊은이들도 있다. 오늘을 ‘연애담론의 시대’ 혹은 ‘연애지상주의의 시대’라고 하지 않던가? 청춘에게 연애는 필수다. 그러나 오늘의 ‘연애’는 자연스런 사랑의 전주곡도 운명처럼 다가오는 설레는 오프닝도 아닌 것 같다. 인의적인 기술이고 전략이고 그래서 연애를 능력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곤 책임지지 않는 연애, 결혼하지 않는 연애 그리고 썸만 타는 연애가 좋다고 한다. 그래서 가볍다.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불안한 당신, 가짜포만감에 중독되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면 불행한 존재다. 그래서 현실에서 사랑의 욕구가 좌절되면 그 어떤 중간대상을 만들어 대리만족을 누려야 한다. 불안이 높을수록 부적과 같은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누구는 ‘술’로 혹은 ‘담배’ ‘게임’ ‘도박’ 그리고 드라마와 영화 혹은 스마트폰으로 그리고 혼외관계의 애인으로 욕구를 채우려한다. 잠시의 달콤함에 ‘한번만’ 혹은 ‘5분만’하면서 쾌락과 유희 속에 빠져들어 마치 이 감정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게다가 뇌의 쾌락중추를 강하게 자극할수록 웬만한 것에 감동하거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더 자주 자극적인 것을 찾는지도 모른다. 결국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 가짜포만감이 친밀해지고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족쇄를 찬 욕망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넘치는 유혹으로 끊임없이 자제력을 시험받는 디지털환경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 포만감은 결국 더 큰 고독과 좌절이 따르리라는 것도 잘 안다.
절제하는 자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
쾌락은 외부적인 자극에서 온다면 기쁨은 내면에서 일어난다. 쾌락은 수고 없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잠깐의 감정이지만 기쁨은 절제와 성찰의 과정에서 얻어내는 내면의 평화다. 그런데 오늘의 디지털속성 자체가 순간의 쾌락감정에 빠지게 한다. 물리적인 공간에는 통제와 규범이 있지만 가상공간에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로부터 쉽게 이탈된다. 그래서일까? 때로는 가치를 추구하고 진실을 찾는 진지한 ‘나’로 때로는 유혹에 굴복하며 자기만족감에 빠지는 경박한 ‘나’로 그렇게 이중살림을 차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가상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면서 책임은 없고 감정만 범람한 사랑을 쫓는다. 몰래 훔쳐보거나 금지된 사랑을 꿈꾸면서 유아적 애정에로 퇴행하기도 한다. ‘자유롭게 사랑하며 맘껏 소비하고 즐기자.’는 달콤한 자본주의의 슬로건에 현혹되기도 한다. 외로움을 몰아내는 가볍게 ‘썸’ 타는 사랑 그리고 소유하고 지배하는 환상으로 숨어든다.
우리는 점점 사랑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감정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고 싶은 것일까? “사랑은 참고 기다려야 하고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도 교만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유혹이 만연해서 그냥 문화가 되어버린 세상, 그래서 참고 기다리며 수고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느님사랑이나 연인에 대한 사랑 모두 결국 나를 극복하고 절제해서 이뤄내는 최고의 덕이며 승리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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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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