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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연결이 아닌 ‘내어줌’
[은빛수녀의 사색노트]
기사입력 2017-10-12 오후 3:43:36
길었던 추석명절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부모, 형제, 친척, 친구... 특히 시부모, 시댁식구들과의 만남 어떠하셨습니까? 관계가 어색하고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너무나도 쉽고 편안한 스마트폰 속으로 숨지는 않았나요.
은빛수녀는 말합니다. “인간은 본래 관계를 통해서만 외로움을 달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관계는 연결이 아니라 내어줌이다.”라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sites, SNS)을 통한 연결로 우리는 무엇을 내어주고 받을 수 있을까요.

나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어머니’라는 거울 앞에서
지독하게 어머니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힘들 때가 아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도 아니다. 다름 아닌 내 자신이 무언가 해내서 너무 기뻐 자랑하고 싶을 때다. 그 누구보다 최고로 기뻐하고 칭찬해줄 어머니, 마음과 사랑을 다해 즐거워 해줄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고 슬픔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동안 나를 가둔 안락한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그 거울을 보며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거듭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아간다. 그러나 이 나르시시즘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인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내 자신을 책임질 것이며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싶다.
가장 행복할 때에도 가장 슬플 때에도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나’가 있다. 누군가와 소통을 할 때에도 내 자신과 대화 할 때에도 역시 ‘나’가 중심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이제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완연한 나이가 되어도 지독하게 놓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이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수련하고 기도하고 또 절제하면서도 여전히 어찌 할 수 없는 것도 ‘나’이다.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라는 거울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어머니라는 거울을 통해 누려왔다면 이제는 내가 다시 그 거울이 되어 누군가에게 돌려줘야하지 않을까싶다. 받은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받은 칭찬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나만 바라보는 지독한 유아적 나르시시즘에 멈춰있게 된다.
그런데 디지털 세상은 온통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아우성이다. 받은 사랑을 돌려줘야 하는데 다시 어린아이처럼 자기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셀카와 셀카봉을 보라. 얼마나 우리의 유아기적 자아도취적 성향을 자극하는지. 때로는 자신의 얼굴의 각도를 맞추며 실물보다 더 과장된 모습으로 보정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이미 우리의 일상이기에 아무도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아마도 우리 인간은 자신에 대한 착각을 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내 자신을 현실보다 더 괜찮은 사람, 거울에 비친 얼굴보다 더 괜찮게 사람들이 보고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부풀리는 허세가 그냥 화장하는 것처럼 일상이 된 거다. 가상의 나와 현실의 나에 대한 괴리감도 ‘나’가 중심이 되면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우리는 철저하게 나 중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에 그렇다. 어머니라는 거울을 통해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충족했던 자기애를 이제는 셀카라는 테크놀로지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면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연출로 자기중심적 경향을 강화시킨다. 자신의 모든 것을 실시간 SNS에 올려놓고 자화자찬과 자기노출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한다.
이렇게 자기에 빠져 살다보면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보게 되니 상대에 대한 오해만 커지고 분노가 늘어간다. 카톡을 보내고 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뭐야. 읽씹하기야.” 혹은 확인하지 않으면 “안읽씹……. 일부러 안보는 거 아냐?” “나에게 삐졌나?” 이모티콘 없이 용건만 보내오면 “흠. 분명 뭐가 있다니까.” "어제 내가 말한 것이 기분 나빴나?“ 하면서 지독한 피해의식으로 스스로를 구속한다. 자기애성 인격 장애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병리적 나리시시즘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독성이 강한 것은 마약도 알콜도 섹스도 아닌 바로 ‘나’가 아닐까 싶다.
지나친 자아도취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셀프홀릭족은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다. 스스로에게 도취될수록 이웃과의 관계는 힘들어지고 외로워진다.
셀프에 중독된다는 것은 홀로 남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나 중심적인 욕망을 생산하게 된다.
인간은 본래 관계를 통해서만 외로움을 달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는 연결이 아니다. 관계는 ‘내어줌’이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일말의 나르시시즘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이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아우성이고 몸부림일 수 있다. 그럴수록 더 외로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본래 관계를 통해서만 외로움을 달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는 연결이 아니다. 관계는 내어줌이다. 내가 대상에게 무언가 줄 수 있어야한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빠져 결국 자아도취적 성향에 빠져 홀로 무인도에 남게 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나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내어줌으로써 더욱 커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채야겠다.
자기 돌봄 없이 외부적인 대상에서 ‘나’를 인정받으려 하면 남는 것은 ‘외로움’ 뿐이다.
자기애에 빠지게 하는 가상의 소통은 이웃을 보는 것에 소홀하게 한다.
건강한 자기애로 내어줄 때 더 많은 세상을 품게 된다.
때로는 나 홀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과 텔레비전 그리고 스마트폰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다른 외부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 모든 외적대상은 내 내면화의 역량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의 상처를 돌보고 부끄러움과 수치심과 질투 그리고 체면에 못견뎌할 때에도 자기 돌봄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외부적인 대상에서 ‘나’를 인정받고 수용 받으려 하지만 남는 것은 '외로움‘뿐이다. 외부적인 대상이 나라는 존재를 수용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지는 결국 나의 내면화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이웃을 볼 수 있고 건강한 자기애로 내어줌의 영성을 살 수 있다. 내어줄 때 마음의 여백이 생기며 더 많은 세상을 품게 된다. 우연히 바라본 꽃 한 송이나 하늘에 떠있는 구름 한조각, 성당의 종소리, 아이의 웃음소리에서도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다.
‘나’를 채우려는 탐욕이 부풀려지면 영혼과 정신의 가치는 소멸되고 영적대화는 더 힘들어진다. 자기애에 빠지게 하는 가상의 소통은 이웃을 보는 것에 소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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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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