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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2-07-05 오후 5:32:00

아! 이임춘 교장신부님
<제2편> 하양성당 주임신부로 하양과 운명적으로 만나다.

기사입력 2019-12-10 오후 1:31:14

애굽의 땅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백성을 인도하여 40년의 광야생활을 전전하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와 같은 삶으로

 

6.25 전쟁이 끝나고 2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대구 대봉동에서 잠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55112일 예편을 하여 그해 51일 이곳 하양 성당 주임신부로 오게 되면서 이 지역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나이 28세였다. 40년이 지나 1994년에 이곳에서 선종하였으니 하양은 신부님의 첫 발령지이자 마지막 발령지가 됐다. 사제로서 전 생애를 우리 지역에서 보낸 것이다.

 

하양은 경상북도의 중앙 남부에 위치하며 팔공산맥의 동남쪽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며 농사를 주업으로 삼아왔다. 50년대에는 가까운 대구의 자본이 들어와 농지의 상당부분이 외지인 소유가 되었고 게다가 전쟁의 여파로 인해 피난민들이 유입되어 당시 대다수 주민들의 생활상은 몹시 가난한 상태였다.

 

하양성당 하양의 북쪽 작은 언덕 위 동서리 618번지에 서 있다. 1915년 용평본당(현 화산공소)의 하양공소로 설립되었고, 1926년 김필곤(바르나바) 신부가 부임하여 하양본당 설립을 준비하여 1929년 아몽(Hamon, 하제안)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건물을 착공 고딕식 첨탑을 가진 본당과 부속사제관이 세워졌다. 사목관할은 하양읍을 중심으로 청도, 용성, 금호, 대창, 와촌, 진량, 청천, 공산등지로 초기에는 상당한 넓은 지역이 하양성당 사목관할 하에 있었다. 19314월 본당, 사제관을 준공, 5월에 대구교구 드망즈(Dmange, 安世華)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성당문을 열고 모두가 하나가 되자. 우선 살려놓고 그 다음에 희망을 갖자.”

 

하양성당의 제8대 주임신부로 발령받은 신부님은 이 지역의 가난과 무지를 몰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성당문을 열고 모두가 하나가 되자. 우선 살려놓고 그 다음에 희망을 갖자.”라는 신념으로 신자·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구호활동에 뛰어 들었다. 당시 하양 조산천 변에는 갈 곳 없고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이 누런 얼굴로 햇볕을 쬐고 있었다고 한다. 신부님은 전 세계 교회와 독지가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 이 지역의 어려운 실정을 알려 후원을 이끌어 냈다.

 

하양읍 동서리에 성가병원 건축 모습(1962)

 


이렇게 모금된 성금으로 우선 실시한 사업이 병원을 짓는 일이었다.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변변히 치료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병원설립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오스트리아의 한 부인회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성가병원을 건립했다. 통역병으로 근무할 당시 인연이 있던 미군병원의 각종 시설을 기증 받아 좋은 시설을 갖출 수도 있었지만 병원의 경영은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치료비는 적게 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비를 탕감해 주었기에 늘 적자에 시달렸고, 많은 사채를 이용하다보니 그 이자를 감당할 수가 없어 자금 압박이 심하여 신부님은 한때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큰 병을 얻을 정도로 극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병원운영 외에도 미군부대 및 구호 관련 기관을 수없이 접촉하면서 전후 복구를 위한 식량, 의복 원조물품을 지원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로와 하천보수, 교량설치 등 사회 간접시설을 확충하는 사업들을 전개하여 일자리를 만들었다. 1955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하고, 하양시장 내 젊은 여성을 위한 양재학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전교는 접촉이다.” ‘접촉을 통한 교세의 확장

 

신부님은 지역민 구호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사제로서 지역 복음화에 온 열성을 쏟았다.

1958년 와촌의 동강공소, 1959년 청천공소를 지었고, 1961년부터 하양성당을 증축하고 교육을 담당할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과 강당과 유치원 건물을 신축했다. 1961418일 청도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같은 해에 진량공소 부지를 확보하여 공소건물을 신축했다. 1963년 금호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됐고, 1969년 평사에 대지를 확보하고 공소건물을 신축했다. 1972년에는 자인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했다. 그 외에도 환상동과 대창에도 공소를 설립하는 등 지역 복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의식을 깨우치다.

 


특히, 신부님은 전교는 접촉이라는 사목방침을 정하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성사를 주면서 주민들의 의식을 깨우쳐나갔다. 본당과 6개 공소를 포함하는 7개의 읍면 전체에 대한 방문을 지속했고, 그러한 접촉을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이 일은 신부님의 16년 재임기간 동안 계속됐다. 이 열정적인 노력은 지역사회의 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무학산 개간사업을 통한 의식 개혁

 

1964, 부분적인 구호활동이나 복지지원활동 보다 더 근본적으로 지역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구상해오던 신부님은 외국의 구호단체들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무학산에 30여만 평의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일반인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이러한 시도는 신부님의 주도로 현실화 됐다.

 

개간당시의 농장모습과 현재 남아 있는 흔적

 


해발 574m 무학산 정상 부근까지 4km에 가까운 진입로를 닦고, 산을 개간하여 초지를 조성하고, 축사를 지었다. 하양 동서리에 생산된 우유를 제품화 하는 공장을 만드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업들을 추진했다. 아직까지 무학산에는 신부님의 정신과 땀이 베인 목장건물의 일부와 목장의 흔적들이 근대화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이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고, 당시 논농사와 밭농사에 의존하고 있던 지역에 목축업을 도입하여 경제적인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지역민들에게 자각과 도전정신을 일깨운 의식 개혁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외국으로부터 지원 받은 구호물자가 성당이나 정부 기관으로 전달되어도 그것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잡음이 발생하여 전국적인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신부님은 개간사업을 통해, 구호물자나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려는 지역민들에게 노동을 통해 정직한 대가를 받는 실용적 사고방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게다가 성장기에 영양실조에 걸린 지역의 아이들에게 우유와 계란을 지급해 주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부님의 정신은 하양본당 신부로 재임 기간 내내 식관 지하실에 닭을 직접 기르신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투철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지하실은 훗날 다른 용도로 쓰이면서도 늘 닭장으로 불리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2~30대에 하신 일이라니 신부님의 담대함과 깊고 큰 인간애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아 이임춘 교장신부님5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글은 박경현 무학고등학교 교장(무학중 7회 무학고 1회 졸업생)께서 쓰신 것을 일부 고쳐서 편집하였음 알립니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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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
    2019-12-10 삭제

    최대표님 잘계시지오...어릴때 성당마당한켠에 쌓아둔 가죽신발 .얻어신고 좋아했던기억 새롭습니다..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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