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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임춘 교장신부님
<제3편> 지역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학교 설립과 인재 양성

기사입력 2019-12-14 오전 11:41:57

무학중학교 건립


국가와 민간차원에서 전 후 복구를 위한 활발한 구호활동과 각종 지원 사업으로 시급했던 농촌의 가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어갔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어갔다.

 

무학중학교 개교 기념식 모습

 

신부님는 여러 가지 사업들을 시도 하면서도 중등학교의 설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지역에 신뢰를 받을 만한 중 고등학교가 없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구로 진학해야 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이 적지 않았다. 우수한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지역의 젊은이들이 이 지역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는 것은 물론 그들이 성장 후에도 애향심을 가지게 되며 지역의 노령화를 막아 활력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통하여 지역의 교회의 활성화와 복음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했다.

 

 

무학중학교 첫 입학식

 

신부님은 1965년 그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교육 사업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무학산 개발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금을 마련하여 19652월 도리동 77번지 현재 학교 부지를 매입했다. 그 당시 중학교 건립의 뜻을 가지고 있었던 한사동의 경주 최 씨들이 설립한 학교법인 동산학원을 인수하여 19651123일 무학중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교사를 신축하여 196635일 개교했다. 이로써 하양 지역에 새로운 중학교 무학중학교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선생님들의 열정과 학생들의 집념이 일군 놀라운 성장

 

개교한 무학중학교의 이사장은 당시 대구교구 교구장 이었던 서정길 대주교, 교장은 이임춘 신부, 교감은 최정환 선생이었다. 학교의 경영 방침은 학생이 주인인 학교, 지역사회의 중등교육을 책임지는 학교, 가난한 농촌 가정에 꿈과 희망을 주는 학교로 정하였다. 1967년 학교의 본관 건물을 완공한 것을 기점으로 신부님의 열정과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학교는 빠른 시간에 지역민의 신뢰를 받으며 성장했다.

 

고등학교 평준화가 시행되기 이전이었던 당시에는 대구 경북권의 경우, 경북고등학교와 경북여고로 진학하는 학생의 수에 의해 중학교의 수준이 평가되었고 농촌 학교에서 이들 학교에 합격자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학중학교는 1회 졸업생부터 경북여고에 1명 합격하는 쾌거를 거두었고, 2회 졸업생은 경북여고 1, 3회 졸업생이 처음으로 경북고등에 1명이 합격하였다. 그리고 5회 졸업생은 경북고등 4, 경북여고 1명을 합격하였으며, 비평준화의 마지막인 6회에는 경북고등에 2명 합격하는 등 놀라운 입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입시 결과가 말해주듯 그 당시의 선생님들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학생들의 의지와 집념도 가히 눈물겨웠다.

 

사제관을 떠나 학교에 전념

 

무학중학교를 설립한 후 학교장을 맡게 된 신부님은 하양성당의 사목과 사회활동을 병행하는 데 한계를 느껴 1970년 성가병원, 1971년 유치원 사업 및 여타 복지사업 등을 정리했다.

1971111일 약 169개월의 숨 가빴던 하양성당 주임신부로서의 업무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하양 도리동에 있던 질녀 집으로 거처를 옮긴 신부님은 1976년까지 이곳에서 지내며 무학중학교의 경영에 전념했다.

 

우수한 고등학교설립에 대한 갈증

 

19663월 개교한 무학중학교는 빠르게 성장하여 지역의 신뢰를 받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은 대구로 해야 하기 때문에 교육으로 인한 부담은 크게 감소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 대도시의 명문학교 못지않은 고등학교의 설립하여 6년간의 중등교육을 책임지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게다가 1975년부터 대도시의 고등학교 평준화가 실시되어 명문고등학교의 개념이 희석되면서 대구 인근 지역의 고등학교가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됐다.

 

신부님은 중?6년간의 중고등 연계교육을 통하여 우리지역 중등교육의 책임지는 고등학교 설립을 간절히 꿈꾸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가 근대화되고 경제적 여건도 호전의 기미를 보임에 따라,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고 교육으로 인한 대도시 집중현상은 점점 심화되어 대구 인근 지역의 공동화 현상은 심각했다. 경산 지역은 대구와의 통행이 용이하여 교육으로 인한 전출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수한 고등학교의 설립은 그 무엇보다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 되고 있었다.

 

독지가 배동경 율리아나 여사와 운명적인 만남

 

신부님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 진 것인지 1974년 뜻밖의 독지가를 만나게 된다. 대구 계산동에서 식당을 경영하던 배동경 율리아나 여사가 평생을 모은 재산을 신부님께 기증함에 따라 무학중학교 설립 9년 만에 고등학교 설립이 현실화 됐다. (율리아나 여사는 사후에 학교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학교내에 무덤이 있다.)

 

무학고 신축현장에서 배동경 율리아나 여사님(오른쪽에서 2번째)과 함께

 

 

19731230일 무학중학교의 뒤편에 교실 6동을 신축하여 1974117일 각 학년 3학급씩 전9학급의 남?녀공학을 내용으로 하는 무학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197533일 남학생 2학급 120, 여학생 1학급 6명 남녀공학 3학급으로 개교했다.

 

이후 19863월 남?녀 공학의 열두 번째 입학생(고등학교 제12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남자 고등학교로 전환하였고(고등학교 제13회 졸업생) 200231일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행정적? 재정적? 인사적으로 완전히 분리?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눔과 섬김으로 공교육의 희망을 보여준 무학고

 

무학고등학교의 주요 시설 확충과정을 살펴보면, 도서의 확충과 더불어 자율학습을 통한 학습의 능률화와 효율화를 위해서 학생들이 단체로 학습할 공간으로 1984630일 도서관 겸 강당 선교 200주년 기념관을 신축하였다. 전교생을 모두 수용하는 920석 규모로 학생들의 학력 향상에 크게 기여 하여 다른 학교에 우수한 사례로 전파됐다.

 

2대 학교장 정순용 선생님은 원거리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와 식당임춘학숙1996730일 준공하여 개관했고, 199673일 고등학교 본 건물 동편에 과학실 전용의 독립 건물을 신축했다. 3대 학교장으로 부임한 이병희 선생님은 재임시절인 다목적 교실(실내 체육관)19991225일 준공했다. 그리고 학교 법인 동산학원1997222일 대구대교구에서 운영하던 학교 법인선목학원에 합병되어 그 해 31일 무학중고등학교도 선목학원에 속하게 됐다.

 

 

현재의 무학중·고 전경

 

2대 학교장 정순용 선생님은 재임시절 무학중고등학교를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로 전환하여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사제가 되고자 하는 성소희망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여 교구의 지원으로 사제 성소자를 위한 합숙지도를 시작했다. 현재 하양천주교회 내에 대구대교구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베드로관(가칭 소신학교, 즉 예비 성소 희망자 합숙관)이 세워져 있다. 학교수업이 종료되면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지도 신부님의 지도를 받아 매년 다수의 학생들이 신학과로 진학하고 있어 교회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2005280명 졸업생 전원이 4년제 대학에 진학한 기쁨을 신부님의 동상과 함께 하고 있다.

 


2003년 권오선 교장선생님이 취임하면서 도입한 학생선택형 수업으로 교육계의 주목을 받아 2005112일 당시 김진표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학교를 방문하여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으로 전국에 파란을 일으킨 무학고의 사례는 공교육의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라는 격찬을 받았다.

 

아 이임춘 교장신부님5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글은 박경현 무학고등학교 교장(무학중 7회 무학고 1회 졸업생)께서 쓰신 것을 일부 고쳐서 편집하였음 알립니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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