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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2-05-27 오후 8:58:00

아! 이임춘 교장신부님
<제1편> 구룡마을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기사입력 2019-12-05 오전 8:55:27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길은 우리가 속한 사회를 향한 희생과 봉사뿐이다. 받은 것을 되돌려 주어라. 재산을 가진 자는 재산을, 지식을 가진 자는 지식을, 힘을 가진 자는 힘을! 이것만이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유일한 보람이다“ - 고 이임춘 교장신부님의 훈화 중에서 -

 

 

이임춘 펠릭스 교장신부님(1927. 3. 2. ~ 1994. 11. 24.)이 선종하신지 벌써 25년이 되었지만, 신부님의 삶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해가 갈수록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일제 강점기에 구룡마을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어 선종하실 때 까지 일생을 우리 지역과 지역민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6.25 동란 직후 지역민들의 굶주림을 구호했고, 가난을 극복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 병원을 짓고, 목장과 기술학원을 만들고, 가난의 근본적 해결책이 교육이라는 혜안으로 무학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기르는 세상의 못자리를 만드셨습니다.

 

무엇보다 사제로서 성당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와 사람을 살리고 희망을 심은 일에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선각자로, 지도자로, 사제로, 교육자로서 우리사회와 우리지역에 더 없이 큰 족적을 남기신 신부님의 생애를 돌아보며, 남기신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1> 구룡마을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하늘 가까운 구룡마을에서 태어난 고집 세고 의협심 강한 산골아이

 

가계와 출생

 

신부님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구룡마을)에서 192732일 아버지 이상우(바오로), 어머니 김계월(모니카)4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용성면 매남리에서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오던 신부님의 조부 이종근(마르코)은 장사를 위하여 대구에 드나들며, 일찍 가톨릭에 입문한 서씨 집안과 교류를 하면서 천주학을 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병인박해가(1866고종 3조선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등선교사 등이 처형된 사건) 있던 시절 당시 경주관하에 속해있던 용성 지역에도 천주학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이씨 문중의 종친들이 패가망신시킬 사람이라며 그 곳을 떠날 것을 요구하여 대를 이어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구룡산 입구 현재의 용성댐 상류방향 있는 귀바위골로 거처를 옮겨 다른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곳까지도 박해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교우들은 언양지역으로 피신을 했고, 신부님의 조부는 20여리 떨어진 구룡산 정상부근으로 이주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부지런한 조부는 7여 년 동안 4만여 평을 개간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여 그곳으로 집안사람들을 이주시켜 청송, 영양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과 90여 가구의 신앙촌을 이루어 살았다. 마을의 신자 회장을 맡아 성미를 모아 공소를 짓기 위한 부지(1,200)를 매입하고 800여원의 기금과 목재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박해가 멈추지 않은 그 시절에 용성면까지 왕래하면서 전교를 하고 교리를 가르쳤다고 하니 신앙에 대한 열정은 순교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조부의 성향을 이어 받은 신부님은 어린 시절 몸이 강건하고 고집이 세며 의협심이 강했다.

 

 

구룡마을, 구룡마을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며 붙여진 구룡산(해발 675m) 정상일대의 마을이다. 구룡산의 서남쪽으로 경산시 용성면 구룡마을, 동쪽은 청도군 운문면 구룡마을, 북쪽은 영천시 북안으로 3개시·군의 경계지역에 위치한다. 1815년 을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청송 노래산과 진보 머루산, 영양의 곧은정과 우련밭 교우촌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됐다. 19211220일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인 안세화 드망즈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구룡 공소가 축성되고, 고 이임춘 신부님 등 14명의 신부 수녀가 배출 되었을 정도로 영남 천주교의 뿌리가 된 곳이다.

 

 

사제의 길로

 

구룡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신부님은 7세가 되던 해에 초등학교 진학을 위하여 산내면 진목정으로 이사하여 의곡초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이 곳 역시 신앙의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모여 살던 깊은 산골 마을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 대구에 있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진학했다.

 

동성학교 시절 모습(1945)

 

신부님의 나이 18세가 되던 19441221일 신학교가 폐교될 상황에 처하자, 신부님은 동료들과 함께 서울 혜화동에 있는 동성상업학교 소신학반에 진학했다. 동성상업학교는 1907년에 개교하여 그 당시 장면 박사가 3대 교장으로 있었다. 그 후 1946525일 경성 천주교 신학교, 1950525일 가톨릭 신학대학 철학과를 거쳐 195061일 가톨릭대학 연구과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하여 신부님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혼란했던 시절인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소년기와 신학교 시절을 보냈다.
 

 

유스티노신학교, 대구 남산동에 위치한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양성기관으로 1914년에 설립되어 1945년 일제에 의해 폐교 되었다가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사제가 되어 전쟁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다.

 

195061일 가톨릭대학 연구과에 입학한 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났다. 학교에 포탄이 떨어지자 한강다리를 죽을 힘을 다해 내달려 건너자마자 다리가 폭파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가까스로 피난을 하였다가 곧바로 그 해 8월 30일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약 2년간 UN군 통역병으로 근무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 군인들, 특히 고급 장교들과도 교분을 돈독하게 할 기회를 갖는다. 이들은 전쟁 후 신부님에게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신부님은 빨리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통역병을 그만두고 당시 부산에 피난해 있던 최덕홍(요한 1902~1954) 주교에게 수학아여 부제품을 받은 후 곧이어 1953년 4월 11일 윤광제 신부님 등 동료 신부님 4명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제서품 후 주교님과 찍은 기념사진(1953, 맨 왼쪽이 이임춘 펠릭스 신부)

 

 

 

사제서품 첫미사 후 가족들과 찍은 기념사진(경주성당)

 

사제서품을 받고는 곧바로 군종신부로 재입대하여 50사단에서 배속되었다가 최전방인 인제로 이동하여 복무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아 가장 치열하던 이때에 최전방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병사들과 버림받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성사를 베풀었고, 마지막 군인이 후퇴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인제에서 군복무시 사단장과 함께(1954)

 

한 번은 신부님이 탄 지프차가 포탄에 맞아 전복되어 4일간이나 흙더미에 묻혀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신부님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사제로서의 길을 뚜벅 뚜벅 걷기 시작했다.

 

아 이임춘 교장신부님5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글은 박경현 무학고등학교 교장(무학중 7회 무학고 1회 졸업생)께서 쓰신 것을 일부 고쳐서 편집하였음 알립니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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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삭제

    어린시절 신부님의 모습이 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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