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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발자국과 한장군 사당이 있는 마곡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7) - 마곡리

기사입력 2026-05-19 오전 9:06:04

▲ 진량읍 마곡리 전경 


 

프롤로그

 

마곡리는 단순히 하나의 행정구역이 아니라, 물과 산, 신앙과 공동체가 함께 빚어낸 역사 공간이다. 마라리와 가제리, 새태로 이어지는 세 각단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먼못의 둑을 따라 한 마을로 이어졌다. 그 곁에는 공룡의 발자국과 청동기인의 흔적이 남아 있고, 조선 시대 고분군이 자리하며, 밀양박씨 입향조를 기리는 원모정이 조용히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특히 이곳은 자인의 수호신 한장군과 누이를 모신 북면의 대표 사당이 있던 자리다. 단옷날이면 면두가 제관이 되어 제를 올리고, 난쟁이로 분장한 아이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마을을 돌던 기억이 아직도 전한다. 오늘 우리는 마곡리의 골짜기 이름 하나, 저수지 하나, 그리고 사당 하나에 깃든 이야기를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속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기억을 지켜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마곡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마곡리는 원래 압독국 마진량현 지사사촌(枝沙寺村)이었다(경상도속찬지리지). 신라가 압독국을 정복하고 압독주를 설치하면서 압독주에 속했다. 8세기 경덕왕 때는 여량현에 속했다. 고려 초 여량현이 구사부곡으로 강등되면서 구사촌에 속한 촌락이 되었다. 조선 초 행정명 개편에 의해 구사부곡 지사사리(枝沙寺里)가 되었다. 1653년 구사부곡이 경주부에서 독립하여 자인현 하북면에 속하면서 지사사리는 가제리(駕堤里)로 바뀌고, 북쪽 가제[현 원지] 옆에 있는 각단을 정식 마을로 승격시켜 마야동리(麻也洞里)라 하였다. 18세기 행정구역 명칭 개편 때 하북면은 북칠동북종동까지 4개 동으로 나뉘고, 마야동리는 마라리(麻羅里), 가제리는 가제곡리(駕堤谷里)가 되어 현내, 후반포, 영청곡, 효곡 등과 함께 북구동에 속하였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하북면이 중북면과 하북면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두 촌락은 하북면에 소속되었고, ‘으로 승격되어 자인군 하북면 가곡동(駕谷洞)과 마라동(麻羅洞)이 되었다. 1911년 동리 통폐합 때 마라의 와 가곡의 을 따서 마곡동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부군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진량면 마곡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진량면 마곡동이라 하다가 1988년 마곡리가 되었고, 1997년 진량읍 마곡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가곡, 마라골, 새태 등 3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 마곡리 지적도(1912)사진 3-마곡리 지적도(1912)

 

가제리·가제내리·가제곡·가곡·갓골·먼못안

 

▲ 가제리 

 

가제리는 신라 때부터 지사사촌(枝沙寺村)이라 불렀다. 마을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경상도속찬지리지. 지사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1653년 구사부곡이 자인현에 속하면서 가제리가 되었다. 가제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가제내리, 가제곡, 갓골 등으로 불렀다. 조선 후기 가제가 원지(遠池, 먼못)로 바뀌면서 먼못안으로도 불렀다. 1912년 당시 21가구 살았다.

 

마야동리·마라리·마라곡·매라골

 

▲ 마라리 

 

마라리는 가제 못둑 매래[무넘기] 옆에 있다고 하여 매래를 한자로 마라로 기록하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 마라리는 1653년 구사부곡이 자인현에 편입되면서 가제 못 둑 옆에 있던 각단을 정식 마을로 승격시킨 것으로 보인다. 1912년 당시 22가구 살았다.

 

새태

 

▲ 새태 

 

새태는 마라리와 가제리 사이, 그리고 가제[먼못] 도로변에 조성된 마을이다. 새로 조성되어 새태라 부른다. 1912년 당시 2가구 살았는데, 일제시대 이후 확장되어 현재 22가구 정도 살고 있다. 마을회관이 있어 마곡리의 중심 마을이다.

 

 

삶의 터전과 흔적


 

▲ 마곡리 지명지도 

 

산골재

 

▲ 구뭇골 

 

마곡리는 동남쪽 선암산 줄기와 서남쪽 도천산 자락이 있는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고개와 골짜기, 산등성이에 관한 이름이 많다. 대표적인 고개로는 마곡 서남쪽에서 자인 신관리로 넘어가는 구뭇골에 있는 구뭇골고개, 가곡(갓골) 동남쪽 서낭당이 있던 당고개, 매랏골 서쪽 현내리로 넘어가는 맷골고개, 새탯골 동쪽 위텅골로 넘어가는 알넘고개 등이 있다.

 

▲ 워텅골 

 

골짜기로는 매랏골 동쪽 용성 고죽리로 넘어가는 고죽골, 고죽골 남쪽 성짓골, 성짓골 남쪽 큰갓골, 매랏골 동남쪽 마을 위쪽이라 하여 위텅골, 매랏골 서쪽 매(사태로 떠내려 온 흙)가 쌓였다는 매통골, 새탯골 동쪽 밤나무가 많았다는 밤나뭇골, 밤나뭇골 서쪽 불당이 있었다는 불당골, 갓골 동쪽 풀이 좋아 양을 풀어놓아 먹였다는 양골, 먼못 남쪽 당골, 당골못 안쪽에 있는 당골못안골 등이 있다. 산등성이로는 먼못 건너편에 있는 건넷등, 매랏골 뒤쪽에 있는 딧등, 밤나무골 위쪽에 있는 밤밭골등, 성짓골 위쪽에 있는 성짓갓등, 큰갓골 위쪽에 있는 큰갓등 등이 있다. 이러한 수많은 골짜기와 등성이 이름은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저수지

 

▲ 원지 

 

마곡리에는 현재 크고 작은 저수지가 7개가 있다. 이중 먼못이라 부르는 원지(遠池)경상도속찬지리지에 가제(駕堤)로 등재된 유서 깊은 저수지다. 당시 관개 28결로 그리 크지 않았다. 이후 몇 번의 준설 공사를 하여 207번지 전체로 확장되었다. 1939년 수리계에서 준설공사를 하였는데, 전체적인 넓이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개축하였다. 처음 저수지 모양이 소의 멍에를 닮아서 가제라 한 것으로 보인다. 1653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이름을 저수지 이름을 따 가제리로 바꾸었다. 그후 조선지지자료에서 원제(遠堤먼못)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당고개못

 

이외 마곡리 465번지 당고개못, 485번지 무명지, 396번지 장곡지, 498번지에도 조선 후기부터 저수지가 있었다. 이 중 465번지 당고개못(옹당못)만 현재 남아 있고, 나머지는 최근 매립되었다. 이들 저수지가 매립되면서 479번지 일대 새 저수지를 축조하였는데, 이 저수지를 현재 장곡지 또는 갓골새못으로 부르고 있다. 또 양골 안 산40번지에도 새로 저수지를 축조하여 마곡지라 부르고 있다.

 

 

밀양박씨 자인 입향조 박운달을 추향하는 원모정

 

▲ 원모정 

 

마곡리 원지 건너편 미래봉(美來峰) 산기슭에 원모정이라는 재실이 있다. 밀양박씨 자인 입향조 박운달(朴雲達, 14911554), 그의 아들 박근손(朴謹遜)을 추향하는 재실로 요산문중에서 1940년 건립했다. 밀양박씨 규정공파 자인 입향조인 박운달은 자는 달지(達之), 호는 요산(樂山),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한양에서 출생하여 1516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과 사포서 별감, 봉상시 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갑자·기묘 사화를 피해 1536년 청주로 이거하여 살다가 50세 무렵 자인현 대원리로 이거하였다. 그에 관한 기록은 1933년 발간된 경산군지부터 등재되어 있다. 1983년 후손들이 박눌생, 박경신, 박운달의 글을 모아 고향 대원리에서 제목을 딴 원리세고(院里世稿)를 출간하였다. 한편 밀양박씨 요산문중에서는 진량산업단지로 인하여 선조의 묘지가 수용되자 2017년 원모정 옆에 납골묘를 마련하고 비석을 세워 놓았다.

 

 

공룡의 발자국을 찾아서

 

▲ 원지 못둑 옆 공룡 발자국 

 

마곡리 원지 못둑 매래[무넘기] 옆 바위에 공룡발자국으로 알려진 둥근 형태의 흔적이 여러 개 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앞발과 뒷발의 흔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 임만구, 박장원 유공비 

 

한편, 이 공룡 발자국 옆에는 1939년 원지를 개축한 수리계 임만구(林萬邱)의 공적을 기리는 원지동부속연해지개수준공비석이 있다. 특히, 이 비문에 새겨진 연해지(淵海池)’는 현재 이름이 사라졌는데, 원지 남쪽 당고개에 있는 당고개못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바로 옆에는 1963년 원지를 수축할 때 공을 세운 박장원(朴長源)을 기리는 박공장원유공비도 있다. 박장원은 앞서 언급한 밀양박씨 박운달의 13세손으로 원지를 수축할 때 거금을 희사하여 도지사로부터 상장 및 금메달을 받았다고 한다. 또 자인향교 전교로 있으면서 대성전 중수도 자부담으로 하였다고 한다.

 

 

자인의 수호신 한장군제를 지내는 한묘

 

▲ 한묘 

 

이러한 마을에 자인의 수호신인 한장군과 누이를 기리는 사당을 짓고 매년 단옷날 한장군과 누이를 추모하는 한장군제를 지내고 있다. 한장군은 신라 때 자인을 침략한 왜구를 누이와 함께 버들못에서 격퇴한 장군이었다. 그의 사후 자인현민들은 누이와 함께 수호신으로 받들고 매년 단옷날 한장군제를 치렀다. 신라 때는 무속식으로, 고려 때는 불교식으로 제를 올리다가 1765년 정충언이 자인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유교식으로 바꾸었다. 이때 자인현민의 단합을 위해서 현청과 멀리 떨어진 동면, 북면, 서면, 남면 등 각 면에 따로 한장군 사당을 지었다. 단오 전날 밤에 각 면의 면두(면장)가 제관이 되어 사당에서 제를 올리고 단옷날 자인 진충묘에 모여 본 제사를 올렸다. 자인현지(1786)에는 북면 마라곡리에 신당 하나를 세워 북면 백성들이 장군의 누이에게 별도의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현내리 한장군 사당터 

 

또 구전에 의하면, 한장군 사당은 원래 현내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북면 북구동에 속하는 마을의 한장군제를 여기서 치렀다. 위치는 뒷골 안 158번지 현내리 서낭당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단옷날 한장군제를 올릴 때면 사람들이 많이 와서 민폐가 되어 어느 노인이 꾀를 내어 기왓장을 현재 한당이 있는 마곡리로 숨겨놓고 한장군이 이곳으로 갔다고 하면서 한당을 이건했다고 한다. 기록과 구전 모두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원래 현내리 당등에 있던 사당을 현감 정충언 때 마라곡리로 이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 마라리 한묘 

 

이처럼 마곡리 한장군사당은 북면을 대표하는 사당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사 비용은 광석, 마곡, 현내 주민들이 갹출했는데, 이때 난쟁이들이 북을 치면서 추렴했다고 한다. 여기서 난쟁이는 실제 난쟁이가 아니고 광대 분장을 한 어린아이였다. 이들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북과 꽹과리를 치는 모습이 흡사 난쟁이처럼 보인 모양이다. 이렇게 제수 비용을 마련한 후 단옷날 자시(子時)에 제를 올리고, 단옷날 당일 자인 계림숲 진충묘에 가서 다시 제를 올렸다.

 

▲ 한묘 

 

▲ 한묘 현판 

 

이러한 전통은 1936년까지 이어지다가 1937년 일제가 한장군제를 폐지하면서 중단되었다. 당시 사당의 위치는 마라리 현재 한묘 사당이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자인 계림숲에 진충묘가 복원되면서 마곡리의 사당도 복원되었다. 위치는 현재 위치인데, 그곳이 자인현 아전 출신인 석씨문중의 산이어서 공간 확보가 쉬었다. 이 과정에서 한당(韓堂)’ 또는 한당사(韓堂社)’라는 명칭을 한묘(韓廟)’로 개칭하였다. 한장군제를 주관하던 모임도 1970년대까지 현내한묘단오제보존회라 하다가 현재는 진량한묘보존위원회라 하여 자인단오제와 별도로 단옷날 한장군과 누이에 대한 제를 올린다. 그후 담장, 출입문, 지붕 등 몇 번의 중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자인단오보존회 마곡 한묘제 

 

▲ 마곡 한묘제 모습 

 

 

에필로그

마곡리는 단순히 옛 지명을 간직한 마을이 아니다. 이곳에는 북면을 대표하던 한장군 사당이 있고, 단옷날이면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모였던 제향의 기억이 살아 있다. 한장군과 누이를 향한 제사는 외적을 물리친 영웅을 기리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장치였다. 이 전통은 오늘 마곡리가 지닌 가장 큰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공룡의 발자국와 한장군 사당을 중심으로 마을의 역사·지명·저수지 이야기를 함께 엮는다면, 마곡리는 단순한 농촌 마을을 넘어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어린 세대에게는 지역의 뿌리를 배우는 교육의 장이 되고, 바깥 사람들에게는 자인의 정신을 만나는 문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년의 행정 변천과 물길의 역사, 그리고 한장군을 모신 제향의 전통이 이어져 온 곳. 마곡리의 미래는 개발이 아니라 기억과 전통을 스스로 해석하고 계승하는 데 있다. 먼못 둑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이 마을이 앞으로도 자인의 수호 정신을 품은 문화 공동체로 성장해 가기를 기대해 본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마곡리 마을 전경 
 
▲ 마곡리 회관 
 
▲ 가곡 마을 전경 
 
▲ 가곡 
 
▲ 마라동 마을 전경 
 
▲ 마라동 
 
▲ 마라동과 보호수 
 
▲ 고죽골
 
▲ 구뭇골
 
▲ 당골
 
▲ 당고개 
 
▲ 뒷등
 
▲ 머못밑
 
▲ 원지 
 
▲ 원지와 원모정
 
▲ 장곡지 
 
▲ 원모정
 
▲ 임만구, 박장원 유공비
 
▲ 공룡 발자국 
 
▲ 공룡 발자국과 유공비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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