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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병영유적지와 폭괘원 터가 있는 선화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3) - 선화리
기사입력 2025-09-19 오전 8:56:22

▲ 진량읍 선화리 전경
◆ 프롤로그
진량읍 선화리는 압독주의 자취가 남아 있는 마을이다. 김유신 장군이 군사 훈련을 하던 두락산과 조선시대 여행자들이 머물렀던 폭괘원 터는 이 마을의 역사적 흔적을 보여준다.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화리는 여러 행정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마을의 전통을 지켜왔다. 동자리가 품은 동자의 전설, 선항동에 전하는 신선 이야기는 물론, 꽃밭등에 흐드러지게 피던 참꽃과 고랫도랑, 동자지, 황룡지 등은 선화리의 삶터이자 기억의 공간이다. 오늘날 이곳은 아파트단지와 공장이 들어서며 도시형 농촌 마을로 변모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옛 마을의 흔적과 숨결이 남아 있다. 지금부터 선화리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 선화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선화리는 6세기 압독주 마진량현 마사리 지역이었다. 7세기 여량현 마사리에 속한 각단이었다가 고려 초 여량현이 하주(하양)와 구사부곡으로 나뉠 때 하주에 속하였다. 당시 마을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자료를 참고하면 동자리(童子里), 두락산리(豆落山里), 가만리(加萬里) 3개의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18년 하양이 경주부의 속현이 되면서 경주부 관할 마을이 되었다. 12세기 경주부에서 벗어나자 다시 하양현 관할 마을이 되었다. 하양은 1601년 임진왜란으로 대구부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1607년 복현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낙산면이 생기면서 하양현 낙산면 가만리, 두락리, 동자리가 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이후 가만리는 폐촌되고,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양현은 하양군이 되고, 두락리와 동자리에 선항동과 화전동이 추가되어 4개의 마을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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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리 지적도(1912)
1911년 일제가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이 4개 마을은 선항의 ‘선’과 화전의 ‘화’를 따 선화동(仙花洞)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진량면이 신설되자 여기에 편입되어 진량면 선화동이 되었고, 1970년대 골프장, 2000년대 이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그리고 원래 신상리에 있던 경산IC가 1998년 선화리 ‘원태들’로 이전했다.

▲ 경산IC

▲ 선항동
▲ 선항동(선화1리·선화8리)
선항동(仙巷洞)은 대구CC로 들어가다가 왼쪽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동자동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정식 마을이 되어 선항동이라 하였다. 마을 동남쪽 골짜기 63번지에 서당이 있어 서당골이라 하다가 ‘서낭’ 등으로 발음이 변화하여 한자 ‘선항(仙巷)’으로 기록되었다. 이 한자를 바탕으로 하늘의 신선이 구름 자욱한 이곳으로 하강하여 잠자리로 삼고 수천 년을 살았다는 마을 유래설이 생겼다. 1895∼1911년까지 독립된 마을로 있다가 1911년 선화동으로 통합되었다. 1912년 21가구 살았다. 일제시대 동자동과 선항동 사이로 자인에서 진량으로 가는 길이 개통되면서 동자동과 분리되었고, 1972년 마을 동쪽 토산 대부분이 골프장이 되었다. 현재 선화1리라 한다. 또 2022년 토산지 못둑 아래 아파트단지가 들어와 선화8리가 되었다.

▲ 동자리
▲ 동자리(선화2리)
동자리(童子里)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등재되어 있어 멀리는 신라, 가까이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하양현 낙산면에 속하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자동이 되었다가 1911년 선화동으로 통합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옛날 한 동자가 떠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뒤 집이 한두 가구 늘어나면서 각단이 되었는데, 동자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여 동자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12년 34가구 살았고, ‘동지니주막[동자점(童子店)]’이라는 곳도 있었다. 현재 선화2리다.

▲ 두인동
▲ 두락리·두인동(선화3리)
두락리(豆落里)는 원래 두락산리(豆落山里)였다. 이 마을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마을에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와 각종 그릇 조각들이 발굴되어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두인동 신라시대 주거지 발굴 유물
15∼18세기 두락리로 바뀌었다가(『호구총수』), 1895년 산의 모양이 도장을 닮아서 두인동(斗印洞)으로 명명했다. 1911년 동리 통폐합 때 하양군 낙산면 선화동이 되었다. 1914년 진량면이 생기면서 진량면 선화동이 되었다가 1997년 진량읍 선화리가 되었다. 이 마을 서쪽 곡식을 재는 말[斗] 모양의 두락산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현재 김유신 장군의 병영유적지로 밝혀졌다. 1912년 두락산 주변에 21가구 살았다. 현재 선화3리다.
▲ 가만리(선화5리)

▲ 가만리 터와 경산윤성1차아파트
가만리(加萬里)는 『호구총수』에 처음 기록된 마을로 현지에서는 ‘가말리’, ‘가마골’, ‘가마닛골’ 등으로 불렀다. 마을이 있는 곳이 쌀을 넣어둔 볼록한 가마니 형상을 닮아 가마니의 사투리 ‘가마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가만리’가 되었다고도 하고, 옛날 이곳에 그릇이나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도 한다. 두락산 서쪽 현재 경산윤성1차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 가만리 신라시대 발굴 유물
이곳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발굴되어 이 마을 또한 신라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폐촌되어 1912년 당시 한두 가구 정도만 살았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는 몰라도, 이 폐촌된 마을에 경산윤성1차아파트 단지가 들어와 마을이 부활하였다. 현재 선화5리다.

▲ 화전동
▲ 화전동(선화4리·선화6리·선화7리)
화전동(花田洞)은 원래 동자리에 속한 각단이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전동이 되어 정식 마을이 되었다. 1911년 하양군 낙산면 선화동으로 통합되었고, 1914년 진량면 선화동이 되었다. 이 각단 바로 서쪽 참꽃이 많이 핀 볼록한 산을 꽃밭등 또는 꽃밭재라 하였는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1912년 12가구 살았다. 일제시대 이곳에 순사주재소가 설치되었다가 신상동으로 이전하였다.

▲ 꽃밭등에 들어선 아파트
현재 원래 마을은 유지되면서 주변에 공장이 들어섰고, 서쪽 꽃밭등에는 영호맨션, 선화청구아파트가 들어와 선화6리가 되었다. 또 2017년 마을 동쪽 산을 깎아 이안경산진량아파트가 건립되어 선화7리가 되었다.

▲ 선화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

▲ 토산
선화리는 압량의 넓은 들판 동쪽과 도천산 끝부분에 위치하여 동으로 토산, 서로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그 사이 야트막한 등성이가 몇몇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지금은 골프장으로 바뀐 토산, 화전동 서쪽 참꽃이 많이 피었다는 꽃밭등, 화전 서북쪽 지형이 개구리를 닮은 ‘깨구리봉’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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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구리봉
현재 꽃밭등에는 영호맨션, 도로 건너 ‘깨구리봉’에는 주유소가 들어와 있다. 두인동에는 모양이 둥그렇게 생겨 두리산 또는 두락산, 남쪽 안갓 등이 있었다. 골짜기로는 선항동 동쪽 서당이 있던 서당골, 두인동 동남쪽 장승이 있던 장승배기 등이 있었다.

▲ 선화리 들판

▲ 가뭇골들과 만서랑들

▲ 원태들
논과 들로는 선항동 동북쪽 고랫도랑의 물을 받던 고랫도랑, ‘용의 다리’ 옆에 있던 용의 다리, 지형이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동자리 남쪽 높은 지대에 옛날 마을이 있던 가뭇골들, 연지못 서쪽 만세량보의 물을 받던 만서랑들, 선항동 북쪽 사르리들, 가뭇골 동쪽 물이 양쪽으로 흘러 섬처럼 보이고 옛날 큰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 섬태들, 폭괘원 터였던 원태들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개발로 모두 잊혀졌다.
◆ 저수지

▲ 연지와 만시랑들
행정구역상 이 마을에 있는 저수지는 건흥지[연지], 입지[사제], 와지, 동자지, 황룡지 등이다. 건흥지는 원래 압량읍 현흥리, 입지는 인안리, 와지는 의송리 지역이었다. 실제 선화리와 주민과 관련있는 저수지는 동자지와 황룡지, 상곡지 3곳이다.

▲ 동자지
동자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등재되어 있어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존재한 저수지다. 규모는 관개 105결(結)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줄곧 이름이 바뀌지 않고 있다.

▲ 황룡지
황룡지는 『조선지지자료』에 황룡제(黃龍堤)로 처음 등재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골프장 내에 있는 상곡지(上谷池)는 일제시대 이후 축조되었다. 이러한 마을에 압독주 시절 김유신 장군이 둔덕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던 병영유적지와 조선시대 여행자를 위한 공공숙소였던 폭괘원이 있었다.
◆ 김유신 장군의 군사 훈련장 제3병영유적지

▲ 두락산
두인동 서쪽 948번지 일대에 모양이 둥근 산이 하나 있다. 이 산을 예전에는 두리산 또는 두락산(豆落山)이라 불렀다. 이러한 모양의 산이 여러 곳에 있는데, 압량리에서는 두룩산, 내리에서는 두릅산, 선화리에서는 두리산(두리기)으로 부른다. 또 신상리 신상중학교가 있는 산 이름도 두락산 또는 낙산이라 불렀는데, 어원은 모두 같은 것으로 보인다. 옛날 토지의 규모를 정할 때 말[斗]을 사용하여 ‘두락’이 하였다. 그래서 이 말 모양을 한 산이라 하여 두락이라 불렀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발음의 변화를 겪었다.
압량과 연결되어 있는 이 지역은 예전 마사리라 불렀다. 마사리는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이 압독주 군주였을 때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다. 그래서 이 산을 당시 군사들의 연병장으로 추정하여 경산병영유적지라 한다.
▲ 경산 제3병영유적지
선화리에 있는 두락산은 제3병영유적지라 부른다. 얕은 구릉에 조성되었는데, 구릉 말단부에 10m 높이에 지름 80m의 토축 원형 광장을 구축하고, 북쪽에 높이 2m, 지름 13m의 토루를 쌓았다. 또, 선화리 유적지 한 가운데 꼭대기에는 어떤 문중에서 관리하는 묘가 하나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하양 현감이 이 산꼭대기에 산소를 서려고 하는데 두리기에 살던 김씨들이 반대했다. 그러자 하양현감은 마을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군대에 보내려 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군대에 가면 후손들이 끊어질 것을 염려해 마을을 모두 떠나버려, 현재 이 마을에는 김씨들이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 전설과 현재의 산소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 여행자 공공숙소 폭괘원

▲ 폭괘원 터
역(驛)은 신라시대부터 교통과 통신의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역과 함께 운영되던 것이 관리들의 숙소 역할을 하였던 ‘원(院)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원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사찰에서 관리하였다. 그래서 사원(寺院)이라는 말이 생겼다. 선화리는 압독국 시절부터 경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그래서 경산과 영천, 경주를 잇는 주요 지점에 역과 원을 설치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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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괘원 터 지적도(1912)
지금까지 확인되는 역은 압량의 압량역, 하양의 화양역, 자인의 산역이다. 원으로는 중방동에 광리원과 월연원, 시지 곶계리에 시지원, 압량 건흥리(현흥2리)에 건흥원, 하양 시천리에 시천원, 양지리에 양야원, 진량 선화리에 폭괘원, 다문리에 다문원, 남천 원리 두야리에 신원 등이 조선시대까지 있었다. 이 중 선화리 폭괘원(幅掛院)은 화전리 북서쪽 565번지에 있었다. 이곳은 주민들 사이에 ‘원태’ 또는 ‘폭괘원 터’라고 전하고 있다. 이 원은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하양현 조에 보이는데, 현의 서남쪽 18리 정도에 있다고 하였다.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원이 폐지되고 사설 주막이 들어서던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1912년 지적도에 국유지라 표시되어 원은 폐지되었어도 터는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
◆에필로그
진량읍내와 압량읍 사이에 위치한 선화리는 농촌형 도시 마을로 바뀌고 있다. 특히, 마을 곳곳에 공장이 들어와 각종 제품을 생산하고,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와 인구 밀집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마을이 이렇게 바뀌기 전인 일제시대에는 두인, 동자, 선항, 화전 마을이 선화동 하나로 통합이 가능하였겠지만, 마을이 점점 확장되어 선화 8리까지 붙이는 상황에서 굳이 일제 때 붙여진 ‘선화’라는 이름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선화1리는 선항리, 선화2리는 동자리, 선화3리는 두락리 또는 두인리, 선화4리는 화전리, 선화5리는 가만리라 하고, 나머지 6, 7, 8리는 그 지역의 옛 지명을 따 붙였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런 이름들은 수백 년 동안 이 마을 조상들이 지어 불렀고, 또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원래 이름을 되찾는 것이 마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선화1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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