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전시관
- 글
운산정이 있는 400년 경주이씨 집성촌 아사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4) - 아사리
기사입력 2026-04-10 오전 9:44:02

▲ 진량읍 아사리 전경
◆ 프롤로그
진량읍 아사리는 금박산 자락 박산골에 자리한 오래된 마을이다. 모래 들판에서 이름을 얻은 이곳에는 400여 년 동안 경주이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고, 그 중심에는 학문과 은거의 정신을 간직한 운산정이 있다. 난세에 공을 세우고도 벼슬을 마다한 한 선비의 삶처럼, 아사리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시간의 결을 품은 마을이다. 산과 골짜기, 논과 저수지,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을 따라 아사리의 옛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 아사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아사리(阿沙里)는 원래 하양현 동면 아사동이었다. ‘아사’의 뜻은 모래들판이라는 설과 불교와 관련한 설 두 가지가 전한다. 전자가 유력하다. 주변에 있는 평사동(坪沙洞), 영천 모사동(毛沙洞), 사리동(沙里洞)은 모두 평사에 뿌리를 두어 마을 이름에 ‘사(沙)’가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17세기 하양현 동면이 중림면과 와촌면으로 분리될 때 중림면 아사리로 바뀌었다(호구총수).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으로 되면서 중림면 아상동과 아하동로 분리되었다. 1911년 동리 통폐합 때 다시 아사동 하나로 통합되어 진량면 아사동이 되었다. 해방 후 1988년 아사리로 바뀌고, 1997년 진량읍 아사리가 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마을은 아상동과 아하동, 중간에 새로 생긴 중간똠, 새로 생긴 새태, 등골 등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근래 공장이 들어서면서 거의 맞붙은 형국이 되었다.
.jpg)
▲ 아사리 지적도(1912)
▲아조·아학·아사·웃똠·아상

▲ 아상동터
아사리의 원 마을이다. 마을이 새가 언덕에 앉은 형국이라 하여 처음 아조(阿鳥)라 하였다가, 새가 학을 닮았다고 하여 아학(阿鶴)으로 바꾸었고, 뒤에 모래가 많이 나와서 아사리(阿沙里)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사리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재된 자료는 『호구총수(1786)』이다. 아사리 위에 있다고 하여 ‘웃똠’이라고도 불렀다.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으로 바뀌면서 아사 북쪽 각단과 분리되어 아상동(阿上洞)이 되었다. 1912년 당시 15가구 살았다. 경주이씨 국당파 집성촌이었는데, 1950년대 폐촌되어 현재 밭으로 변했다.

▲ 아랫똠
▲ 아하동·아랫똠
아하동은 임진왜란 이후 자인현 관상리의 두암 이강 선생이 이주하면서 조성된 마을이다. 원 아사리 아래에 있다고 하여 ‘아랫똠’이라고 했다. 1895년 독립된 마을로 승격되어 아하동이라 하였다. 1911년 아상동과 다시 통합되어 아사동이 되었다. 1912년 당시 36가구 살았다. 경주이씨 익재파 집성촌으로 운산정이라는 재실이 있다.

▲ 중간똠
▲ 아하동·중간똠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웃똠과 아랫똠 사이에 있다고 하여 ‘중간똠’이라 하였다. 정식 행정구역으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아하동에 속했다. 1912년 당시 16가구 살았다.

▲ 새태골
▲ 신기·새태골
신기는 아하동 북쪽 589번지 일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태골 또는 신기라 하였다. 1912년 당시 2가구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공장이 들어서 있다.

▲ 등골
▲ 등골
등골은 아하동 동쪽 저수지 안 등골에 조성된 마을이다. 아하동과 맞붙어 구분이 안 된다. 1912년 당시 8가구 살았다.

▲ 아사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산골과 논

▲ 한골
아사리는 금박산의 박산골에 있다 보니 골짜기와 산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아사 동남쪽 큰 골짜기인 한골, 한골 동쪽 옛날 절이 있었다는 절골[사곡(寺谷)], 절골 남쪽 금박산에 있는 박산골, 박산골 남쪽 야시(여우) 굴이 있었다는 야시골, 야시골 남쪽 배나무가 있었다는 배나무골, 배나무골 남쪽 옛날 집터가 있었다는 탯골, 탯골 서북쪽 양지쪽인 개양골[갱골], 갱골 서쪽 독잣골, 독잣골 서쪽 둠벙이 있던 돔방골, 아사 동쪽 등성이 위에 있던 등골, 등골 아래 서당이 있었다는 서당골, 등골 남쪽 샛골[신곡], 샛골 북쪽 옛날 중림면에서 가장 멀다고 하여 멀골[원곡], 멀골 동쪽 꽃밭골 등의 골짜기가 많았다.

▲ 갱골만딩이
그리고 새탯골 동쪽 묘비가 서 있었다는 비선등, 등골 동쪽 용이 등천했다는 용짓등, 갱골 위의 갱골만딩이, 꽃밭골 위의 꽃밭골만딩이, 아사 서쪽 봉우리가 둥그렇게 생긴 두루봉, 아사 서남쪽 옛날 이곳에서 매를 놓아 사냥했다는 맷봉말랭이, 멀골 위의 멀골만딩이, 아사 남쪽의 솔갓[송잠(松岑)], 탯골 위의 탯골만딩이, 아사 북쪽 행상집[상엿집] 건너편 행상만딩이 등의 등성이와 산이 있었다.

▲ 아사리 들판
아사리 주민들의 먹거리를 제공하던 논으로는 아사 서쪽 바닥이 깊었다는 굳개논, 굳개논 남쪽 맷봉말랭이 밑의 맷빙이논, 굳개논 아사 남쪽 깊숙한 곳에 있던 굼논, 굼논 남쪽 밭두둑이었다는 밭덤, 새탯골 서쪽 새로 논을 만들었다는 새논, 새논 동쪽 길었다는 진논, 아사 동남쪽 지형이 주걱처럼 생겼다는 주걱배미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 대곡지
▲ 저수지
아사리에는 조선 후기 크고 작은 저수지가 여섯 개 정도 있었다. 가장 오래된 저수지는 한골에 있는 대곡지[한골못]와 갱골에 있는 갱골못[개양지(開陽池)]이다. 대곡지는 『조선지지자료(1911)』에 대곡제라 등재되어 있다. 아상동 남쪽 골짜기 신곡지는 원래 바로 위 117번지에 있던 저수지를 확장한 것이다.

▲ 개양지
이외 사곡 또는 샛골, 절골이라 부르는 125번지에 있는 사곡지(새곡지·절골못)와 아하동 동쪽 등골 11번지에 있는 등골못이 있다. 새곡지는 원래 사곡지였는데 음운변화를 일으켜 ‘새곡지’로 굳어졌다. 이들 저수지는 모두 조선 후기 축조되었다. 그리고 아사 북쪽 신기의 꽃밭골에 있는 꽃밭골못[꼬박지]은 일제시대 이후 축조되었다.

▲ 웃당터
▲ 아사리 동제
아사리의 동제는 정월대보름날 ‘웃당’과 ‘아랫당’ 또는 ‘남당’과 ‘여당’, ‘할배당’과 ‘할매당’이라고도 불리는 2곳에서 지냈다. ‘웃당’은 대곡지 진등[장등] 아래 산 31번지에 위치한 제당이었으며, ‘아랫당’은 마을 입구 348번지 보호수인 느티나무로 수고 15m, 흉고 둘레 2.7m, 직경 13m, 수령 167년에 달한다.

▲ 아랫당
음력 정월 보름 해뜨기 전 아침 5시∼6시 사이에 지낸다. 밥은 ‘웃당’에만 올리며, ‘아랫당’에는 밥과 술, 닭을 제외한 나물과 과일 등을 담은 상만을 올린다. ‘웃당’에서만 축을 읽고 소지를 올렸다. 전통적으로 남자가 제관이었는데, 한때 여자가 제관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 웃당은 폐철되었고, 아랫당인 느티나무는 아직도 있으나 보호수 비석을 만들어 주민들이 개인적으로 제를 지낸다.

▲ 금박산
▲ 기타 삶의 흔적
마을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산은 금박산이라 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동북쪽 아사리, 서쪽 진량 현내리, 남쪽 용성 고죽리, 서남쪽 자인 신관리가 위치하고 있다. 옛날 자인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인식되어 가물 때 자인현감이 직접 기우제를 지냈고,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 운산정
◆ 운산정과 경주이씨
이러한 마을에 경주이씨가 400여 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웃똠[아상동]에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아랫똠[아하동]에는 경주이씨 익재공파 후손들이 세거를 하고 있다. 특히, 아랫똠에는 익재공파 입향조 이강(李江)을 추향하는 재실 운산정도 있다.
▲ 경주이씨 익재파 아사리 입향조 이강과 운산정
이강(李江)의 본관은 경주이고, 시조 신라 육부촌장 이알평의 64세손, 중시조 이거명의 28세손, 익재공 이제현(17세)의 11세손이다. 부친은 자인면 관상리(신관리)에 살았던 의병장 묵헌 이기업(李起業, 1561∼1631)이다. 이기업은 아들 8명을 두었는데, 강(江)은 셋째로 태어났다. 자(字)는 선보(善寶), 호는 두암(杜菴)이다. 관상리에서 태어나 한양에 가서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친 이시발(李時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다수 참획하였다. 이후 인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기뻐서 시를 남겼다.
殲得群凶洗(섬득군흉세) 흉악한 무리를 모두 쓸어내어 세상을 깨끗이 하였고
海東政看民(해동정간민) 해동의 정치란 백성을 살피는 데 있음을 보여주었네.
太平同如今(태평동여금) 이제 태평한 세상이 바로 오늘과 같으니
爲誦淸阿頌(위송청아송) 맑고 고운 찬가를 읊으며
北斗遙瞻賀(북두요첨하) 멀리 북두성을 바라보며 그 위업을 축하하노라.
聖功素性恬(성공소성념) 성스러운 공은 본래 담담한 성품에서 나왔으니
退不樂仕進(퇴불낙사진) 물러나서는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즐기지 않네.
만년에 하양현 중림면 아사리로 이거하여 송잠(松岑·솔갓) 아래 자그마한 정자를 지어 운산정(雲山亭)이라 명명하고 두문불출 학문 탐구에만 열중하였다. 은거의 삶은 부친 묵헌공의 유훈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촌 이내 친척은 모두 정와(正窩), 둔재(遯齋), 은재(隱齋), 은와(隱窩) 등 은거를 의미하는 글자로 자호를 삼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과 학문 탐구로 생을 보냈다. 그의 사적이 『하양읍지』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 확인은 안 된다. 아들은 인발(仁發), 손자는 여송(汝松)과 여식(汝植)을 두었는데, 여송의 후손은 현재 아사리에 살고 있고, 여식의 후손은 청도로 이거하여 살고 있다.

▲ 운산정 현판
이강의 사후 운산정이 유실되었다가 1965년 13세손 이기호(李琪鎬)가 문중 회의를 통하여 운산정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수한 운산정은 정면 4칸, 측면 한 칸 반,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 운산정중수기
▲ 중수기념비
마루 중앙에 하양의 허대원(許大遠)이 1973년에 쓴 「운산정중수기」 게판문이 있고, 정면 처마에는 자인면 신관리 관상문중의 삼초(三?) 이희우(李曦雨)가 1976년에 쓴 「운산정」 현판이 있다. 그리고 경내에는 운산정 중수를 기념하는 「운산정 준공 및 중수기념비」가 있다. 현재 운산정은 기와를 걷어내고 현대식 기와로 중수한 상태이다.
▲ 자인면 신관리
아사리 경주이씨는 대파로 익재파, 중파로 소경공파, 소파로 묵헌공파에 속하며, 500년 경주이씨 집성촌 자인면 신관리 관상문중은 일명 큰집, 아사리는 작은집에 해당한다.
◆ 에필로그
아사리에는 한때 위똠과 아랫똠을 합하여 경주이씨가 10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나가 귀향하지 않고, 또 마을 새태 쪽에 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타성들이 들어와 살면서 집성촌의 성격이 희석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50여 호 가까이 경주이씨들이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아사리는 씨족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마지막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jpg)

.jpg)
.jpg)
.jpg)
.jpg)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jpg)
.p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