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전시관
- 글
마진량현의 현청이 있던 현내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6) - 현내리
기사입력 2026-05-09 오전 9:15:46

▲ 진량읍 현내리 마을 전경
◆ 프롤로그
진량읍 현내리는 이름 그대로 ‘현 안(縣內)’의 기억을 간직한 마을이다. 오래전 이곳에는 신라 압독국 시기 마진량현의 현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영청골과 현안, 비석걸, 생교답, 창거리 같은 지명은 옛 고을의 흔적이다. 세월이 흐르며 관아 건물은 사라지고 마을의 모습도 변했지만, 들판과 골짜기,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오랜 시간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현내리는 단순히 옛 행정 중심지였던 마을을 넘어, 삼국시대의 생활 흔적과 조선시대 지역 행정의 기억, 그리고 해방 이후 격동의 현대사를 함께 품고 있는 공간이다. 문헌 기록과 구전, 고고학 조사 결과를 따라가다 보면 이 작은 농촌 마을이 지나온 시간은 곧 지역 사회가 겪어온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마진량현 현청의 흔적을 중심으로 지명과 전설, 삶의 터전의 변화, 그리고 이념의 충돌 속에서 남겨진 아픈 기억까지 함께 살펴보며 현내리의 시간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 현내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현내리(縣內里)는 신라 때 압독국 마진량현 현청이 있던 ‘영청골’이었다. 고려 초 마진량현이 구사부곡으로 강등되면서 현청도 폐철되었다. 1018년 구사부곡이 경주부 관할로 바뀌면서 경주부에 속한 구사촌 영청골이 되었다. 1653년 자인현민과 구사촌 주민들의 노력으로 경주부에서 독립하여 자인현 하북면 영청동이 되었다. 19세기 초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청동 동북쪽 각단을 현내리로 승격시켜 광석, 가제곡, 마라, 후반포, 효곡 등과 함께 하북면 북구동에 속하였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하북면이 중북면과 하북면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현내리와 영청리는 하북면에 소속되고, ‘리’가 ‘동’으로 승격되어 자인군 하북면 영청동과 현내동이 되었다. 1911년 영청동과 현내동이 통합될 때 마을 이름을 현영동(縣永洞)으로 하려다가 결국 현내동으로 결정했다. 1914년 부군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진량면 현내동이 되었다.

▲ 현내리 마을을 가로지르는 고속철로
해방 후에도 진량면 현내동이라 하다가 1988년 현내리가 되었고, 1997년 진량읍 현내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마을은 영청, 현내, 비석걸, 효곡 네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013년 경주로 가는 고속철로가 개통되면서 영청골과 현내가 철길로 분리되고, 기존 도로는 지하도가 되어 두 각단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
.jpg)
▲ 현내리 지적도(1912)
▲ 영청·영청골

▲ 영청골
영청(永靑)은 영청골로 부르는데, 옛날 마진량현의 현청과 공청객사 등 ‘영(營)’과 ‘청(廳)’이 있던 곳이라서 영청(營廳)이라 하다가 간략화하여 ‘영청(永靑)’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 현내리의 중심 마을이었다. 마을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호구총수』인데, 이미 압독국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진량현이 구사부곡으로 강등되면서 현청이 폐철되고, 이름만 남아 있다가 1914년 공식적인 마을 이름도 사라지고, 사람들의 입에서만 ‘영청골’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1912년 당시 34가구가 살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 선안
▲ 현내·선안·현안
현내는 마진량현의 현청 안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서는 사투리로 ‘선안⋅현안골’이라고도 한다. 영청골보다는 나중에 조성된 마을로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없다가 『자인현지(1832)』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19세기 초에 정식 마을로 등재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영청동과 통합되어 이 마을의 중심 각단으로 자리 잡았다.

▲ 비석걸
▲ 비석걸·비석골(현내)
비석걸은 비석이 서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옛날 마진량현의 현청이 영청동에 있을 때 현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현감들의 선정을 선양하는 송덕비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석걸’이라 하다가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비석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2년 당시 논밭과 숲이었는데, 일제 시대 광석리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면서 ‘비석걸’ 또는 ‘비석골’이라는 촌락이 되었다. 행정구역상 현내리에 속하여 현내 비석걸이라 한다.
▲ 현광교회
과거에는 영천최씨가 운영하던 광석정미소와 현광교회 등이 있었는데 정미소는 운영을 중단하고 교회와 몇몇 가구만 남아 있다. 길 건너 광석리 비석걸과 접하고 있었는데, 경산4일반산업단지 부지로 수용되어 마을이 없어지면서 현내 비석걸만 산업단지와 접해서 남아 있다.

▲ 효곡
▲ 효곡·속골
효곡(孝谷)은 영청골 북쪽 들판 건너편 속골지 아래에 조성된 마을이다. 원래 ‘속골’이었는데, 한자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효곡’이 되었다. 『호구총수』에는 등재되지 않고, 『자인현지(1832)』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현내리와 함께 18∼19세기 사이 정식 마을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이 효곡은 19세기 후반 현내리에 병합되어 더 이상 관련 자료는 나타나지 않는다. 1912년 속골 아래와 소고당지 동쪽에 5가구 살았다.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집들이 사라져 촌락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

▲ 현내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현내리의 산·골·재

▲ 현내리에서 본 금박산
현내리는 동쪽, 남쪽, 북쪽이 모두 금박산에서 내려온 산등성이가 에워싸고 있고, 서쪽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그러다 보니 옛날부터 산과 등성이, 골짜기와 고개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대표적인 산은 마을 동쪽에 있는 금박산이다. 이 금박산에 있는 ‘무등’이라는 등성이에서 옛날 자인현 기우제를 지냈다. 또 소부단못 서쪽 옛날에 꽃이 많이 피었다는 꽃밭재, 현안 남쪽 동네 소유 말림갓이 있었다는 동네갓되배기, 티일 북쪽 새방골에 있는 새방갓도 이 마을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 못안등
등성이로는 배나무골못 안에 있는 못안등, 못안등 서쪽 배나뭇골못의 무넘기(매래) 위에 있는 못매릇등, 못매릇등 서쪽 양쪽으로 못이 있어서 마치 섬처럼 되어 있던 섬등, 섬등 서쪽 길이 나 있던 질등, 무등 북쪽의 길게 뻗어 있는 진등, 질등과 진등 가운데 있는 가분뎃등, 진등 북쪽 살맷등, 살맷등 북쪽 커다란 큰등, 큰등 북쪽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잘록한 새밭놀, 새방갓 북쪽 대밭이 있던 대밭등, 대밭등 북쪽 대추나뭇등 등이 있었다.
▲ 현내리의 고개와 골짜기

▲ 당고개
고개로는 티일에서 금박산으로 넘어가는 티일재, 현내 서북쪽에서 시문리로 넘어가던 당고개(여기에 서낭당이 있었음), 현내 서쪽에서 영천 구기동으로 넘어가던 박산재 등이 있었다.

▲ 범욋골
골짜기로는 선안 남쪽의 범욋골(범어골), 범욋골 남쪽의 아방골, 범욋골 북쪽의 큰골, 큰골 북쪽 모과나무가 많았다는 모과골, 모과골 북쪽의 성짓골, 성짓골 북쪽 새방사라는 절이 있던 새방골, 선안 뒤쪽의 뒷골, 뒷골 서북쪽의 새밭골, 새밭골 남쪽 매가 잘 앉던 맷골, 맷골 남쪽 가장골, 가장골 남쪽 구들장을 캤다는 구들빼골, 구들빼골 동쪽 대흥사에 딸린 암자 옥천암이 있었다는 옥천암골, 옥천암골 북쪽 전에 금당이 있었다는 금당골, 새밭골 북쪽 중의 시체를 화장했다는 중산골, 중산골 북쪽의 맛골, 영청골 동쪽 수박을 닮았다는 수박등, 창거리 동쪽 기영골 등이 있었다.

▲ 옥천암골
▲ 현내리의 저수지

▲ 새밭골못
현재 현내리에 속한 저수지는 7개 정도 확인된다. 그러나 원래 10개의 저수지가 있었다. 이중 ‘새밭골못’과 ‘이양지(梨陽池)’는 『여지도서』에 등재된 오래된 저수지다. 새밭골못은 원래 서박동제(西朴洞堤)였는데 새밭골을 한자 서박동으로 기록하였다. 당시 둘레가 347척이었다. 현내리 573번지 새밭골에 있다.

▲ 이양지
이양지는 원래 이동제(梨洞堤)였다. 배나뭇골에 있어 ‘이동제’라 불렀다. 나중에 이곡제라 부르다가 현재는 햇빛이 잘 든다고 하여 이양지(梨陽池)라 부르고 있다. 현내리 138번지 배나뭇골에 있다. 특히, 이 두 저수지 주변에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기와와 토기 조각 등이 발굴되어 이 일대에 삼국시대부터 생활 기반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jpg)
▲ 현내리 유적 발굴 장면(출처:백두문화재연구원)
『자인현읍지』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 축조된 저수지로는 656번지 ‘소고당지’, 567번지 ‘속골지’, 25번지 ‘아방골못’ 등이 있다.

▲ 소고당지
소고당지는 ‘소부단못’으로도 부르는데 옛날 이곳이 효곡동이어서 효곡이 사투리화하여 ‘소곡’, ‘속골’이 된 것으로 보인다. 효곡동 들판 가운데 있어 일제 때 농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속골지는 한자로 효곡지(孝谷池)라 한다.

▲ 속골지
옛날 관청의 관속들이 생활하던 곳이라서 속골이라 하였고, 여기에 못을 축조하여 속골지라 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효곡이 속골로 사투리화하면서 변화된 것인데, 현청과 관련하여 윤색된 어원설로 보인다.

▲ 범어지
아방골못은 현내리와 용성 고죽리 사이에 있는 해발 420m 아방산의 아방골에 있는 못이라서 아방지 또는 아방골못으로 불렀다. 아방은 앞쪽의 우리말 ‘앞방’을 표음으로 연철한 것이다. 현재는 매립된 상태다.
이외 32번지 범어지, 174-1번지 구후곡지, 561번지 후곡지(뒷골못⋅현내지), 397번지 마현지, 새막골 위에 있는 무명지 등은 해방 전후 축조된 저수지다. 특히, 마현지는 마곡과 현내 중간에 있다고 하여 마현지라 명명하였다.
▲ 현내리의 비석
▲ 현감강후휘옥영세불망비
현내리에는 비석이 4개 있다. 하나는 비석걸로 부르는 광석리 입구에 있고, 나머지 3개는 현내리 입구에 일명 ‘삼비(三碑)’라 하여 마을 표지석과 함께 나란히 3개가 서 있다. 비석걸 비석은 제70대 자인현감 강휘옥의 「현감강후휘옥영세불망비」이고, 건립 연도는 1799년 10월, 감역은 임강(林綱, 1749∼1805)이다. 이 비석이 세워져 있는 바위는 지석묘로 알려져 있다.
▲ 현내리 삼비
‘삼비’ 중 「박공장원공로비(朴公長源功勞碑)」는 박장원이 1932년 범어지 신축, 이양지(梨陽池) 개축 및 현내지 도감 등을 역임한 공로로 1978년 이정상 감역으로 세웠다. 「박공지산송덕비(朴公芝山頌德碑)」는 전매서장을 역임한 박지산이 한묘 복원과 후곡지 신축 등의 공로로 세웠는데, 비문은 1974년 자인 신관의 이공우가 짓고 최기원이 썼다. 「배공기준표적불망비(裵公基濬表積不忘碑)」는 배기준이 아방지를 개축한 공로로 1943년 세운 것을 1978년 다시 세웠다.
▲ 영청골 당목
▲ 선안 당목
▲ 현내리의 당목
현내리에는 예전부터 동제를 지내던 당목이 아직 남았다. 영청골 입구의 회화나무 한 그루와 선안 입구 선안숲의 회화나무 한 그루와 이팝나무 한 그루이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매년 동제를 지냈으나, 40여 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 현내리 전설

▲ 금박산 무등
현내리에는 「혈이 끊어진 금박산」, 「도막샘」이라는 두 전설이 전한다. 현내리 동쪽 해발 400m의 산을 금박산이라 한다. 옛날 자인현의 영산으로 여겨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금박산은 원래 금학산으로 불렀는데, 신관리의 금학산과 구분하기 위해서 금박산으로 바꿨다. 이 산 아래에 유명한 장수가 난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전국의 명산에 혈을 끊었다고 한다. 이때 금박산의 혈도 같이 끊어졌다고 한다(현내리 최일호 구술).

▲ 도막샘
도막샘 전설은 현내리 범어골에 있는 도막샘 유래에 관한 이야기다. 도막샘은 금박산 줄기에 자리 잡고 있어 금학약수라 불렸다. 이 샘은 가물 때나 비가 올 때나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였다. 또 몸이 가려울 때나 위가 좋지 않을 때, 편두통이 있을 때, 옻이 올랐을 때 이 물을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찾았다. 물을 마신 후 물값으로 엽전 한 닢을 돌 틈에 끼워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자인현감 류도석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 약수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찾게 되었다. 물을 마신 후 샘의 이름을 지으려 하자, 자인 아전 문장복이 자기 땅이라면서 자기에게 이름을 짓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문장복이 ‘도막샘’이라 지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샘의 좌측 위 바위에는 ‘금학약수천착개(金鶴藥水泉鑿改) 학곡신기문장복(鶴谷新基文章馥)’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뜻은 ‘금학산에 있는 약수샘을 고쳐 팠음. 학곡 신기의 문장복’이다. 문장복은 1888년 자인현 행수군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물길이 끊기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메워진 상태다. 주민들은 이 샘을 ‘물탕’이라 부른다.
◆ 이념의 갈등이 빚은 일가족의 비극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새로운 국가 체제 수립을 둘러싼 극심한 이념 대립에 휩싸였다. 좌우 세력이 충돌하는 가운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남로당 계열 좌익 조직은 지하로 잠입하거나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정부는 좌익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며 미전향자는 수감하고, 전향자는 1949년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해 관리했다. 그러나 잔존 세력은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특히 여수·순천 사건 이후 탈영한 군인들이 산악 지대에 합류하면서, 팔공산과 금오산, 지리산 등지는 공비들의 주요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경산 역시 이 비극의 소용돌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1949년 7월 남천면 산전동 아지트 급습과 고산면 삼덕동 교전 소식이 영남일보(1949년 8월 2일 자)에 실릴 정도로 상황은 긴박했다. 10월에는 하양면 금락동이 습격당했고, 11월에는 와촌면 박사동에서 주민 32명이 희생되는 대규모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2월, 남산지서 역습 사건으로 경산경찰서장 등 경찰관 5명이 전사하면서 경산 전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량면 현내리 영청골에서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49년, 현내리 동쪽 금박산 깊은 산중에는 소규모 공비가 아지트를 마련하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산속에 숨어 지내다가 식량이 떨어지면 민가로 내려와 주민들을 협박하여 식량을 탈취해 갔다. 7월 초 어느 날 대낮이었다. 공비 4∼5명이 영청골의 한 집으로 내려와 주인을 위협하며 음식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들은 방 안에 들어앉아 밥을 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한 최현주가 급히 지서에 신고하였다. 출동한 경찰이 포위망을 좁히며 항복을 권유했으나, 공비들의 선제 사격으로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결국 공비 대부분이 현장에서 사살되었지만, 한 명이 뒷문으로 달아나 산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인 7월 12일, 보복을 결심한 공비들이 영청골로 다시 내려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신고를 했던 최현주의 집이었다. 당시 최현주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경찰이었는데, 공비들은 경찰 가족에게 보복을 하려고 온 것이었다. 집에는 최현주 부부와 큰아들 내외, 그리고 아홉 살과 두 살 된 손녀, 네 살 된 손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 공비들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집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최현주와 아들 최일경은 급히 집을 빠져나와 먼못 아래 들판으로 달아났고, 아내와 며느리는 어린아이들을 안고 집 옆 개울가로 숨었다. 아홉 살이던 큰 손녀 영자는 거름더미 속으로 기어들어가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잠시 뒤, 거친 발소리와 함께 공비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문을 걷어차는 소리, 고함을 지르며 방과 마루를 뒤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린 영자는 가마니 속에서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집 안 수색을 마친 공비들은 이번에는 거름더미를 죽창으로 마구 쑤셔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죽창 끝이 영자의 옆구리를 스치듯 파고들었지만, 영자는 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입을 막고 버텼다. 끝내 숨어 있는 가족들을 발견하지 못한 공비들은 들판으로 달아난 남자들을 쫓는 데 집중했다. 그 덕분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은 절망적인 통곡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아침, 영청골 입구 개울가 다리 아래에서 최현주와 아들 최일경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눈이 뽑히고 온몸이 죽창에 찔린 채 참혹하게 살해되어 있었다. 한 집안의 기둥이었던 두 남자를 잃은 가족은 하소연할 곳 없는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여성들만으로 힘겨운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지금은 평온한 농촌 마을로 남아 있는 영청골과 못둑마을이지만, 금박산 아래에는 국가 수립기의 혼란과 이념 대립이 남긴 깊은 상처가 여전히 지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 에필로그
오늘의 현내리는 더 이상 현청이 있던 고을의 중심지는 아니지만, 금박산 아래 넓은 들판 속에서 오랜 시간을 이어오고 있다. 영청골과 현안, 비석걸과 생교답 같은 지명은 이곳이 한때 지역의 중심이었음을 지금도 조용히 전해 준다.
현내리가 지나온 역사는 한쪽의 기억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국가 수립기의 혼란 속에서 국군과 경찰의 토벌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이 있었던 것처럼, 좌익 무장 세력의 횡포와 양민 학살 또한 분명 이 지역이 겪어야 했던 또 다른 비극이었다. 서로 다른 기억을 함께 바라볼 때 비로소 지역의 역사는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 위에 서 있는 현내리는 이제 과거의 상처를 넘어 평온한 삶과 공동체의 가치를 이어가는 마을로 나아가고 있다. 역사 속 아픔을 기억하되 그것을 화해와 성찰의 자산으로 삼을 때, 현내리의 내일은 더욱 단단한 희망 위에서 이어질 것이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jpg)
.jpg)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jpg)
.p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