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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세 가족이 살게 된 평사리의 사연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2) - 평사리

기사입력 2026-03-09 오전 9:33:20

▲ 평사리 전경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이름의 마을이 셋으로 나뉘어 살아온 곳이 있다. 하나는 하양에, 하나는 자인에, 또 하나는 영천에 속한다. 같은 땅에서 물을 나누고, 같은 들판을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행정의 경계는 그들을 세 갈래로 갈라놓았다. 진량읍 평사리는 이렇게 한 지붕 세 가족의 운명을 안고 살아왔다. 마진량현에서 구사부곡으로, 다시 자인·하양·영천으로 쪼개지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논을 일구고, 못을 파고, 신앙을 지키며 삶을 이어왔다. 이번 연재에서는 경계의 틈에서 태어난 평사리의 분리와 공존, 잊힌 지명과 사라진 들판, 그리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 하양 평사리 행정지도 

 

▲ 자인.영천 평사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 마진량현에서 구사부곡, 그리고 반환의 역사

 

평사리는 원래 마진량현의 동쪽에 있었다. 마진량현이 고려 때 구사부곡으로 강등되면서 장산(경산자인현과 함께 경주부에 속하였다.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된 후에도 구사부곡은 여전히 경주부에서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자인현민들이 1637년부터 끈질지게 구사부곡합속운동을 벌인 결과 1653년 구사부곡을 돌려받았다(자인현읍지).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인현은 주변 현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평사리 지적도(1912)

 

특히, 자인·하양·영천의 접경지에 있고, 비옥한 농경지를 가진 평사리는 당시 3개 군현이 눈독을 들일 만한 마을이었다. 이에 자인현은 평사리 등 3개 군현과 인접한 마을을 분할하여 하양과 영천에 양도하였다. 이러한 사연으로 평사리는 길 하나를 두고 하양현 평사리(坪沙里, 하양평사), 영천군 평사리(平沙里, 영천평사), 자인현 평사리(平沙里, 자인평사)로 분리되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살게 된 사연

 

▲ 하양 평사 전경 

 

평사리·하양평사의 형성과 변화

원래 구사부곡에 속했던 하양평사는 1653년 구사부곡에서 분리되어 하양현 동면 평사리(坪沙里)로 편입되었다. 18세기 동면이 와촌면과 중림면으로 나뉘면서 중림면에 편입되어 하양현 중림면 평사동이 되었다. 이 체제는 1911년까지 지속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진량면을 신설할 때, 평사동은 진량면 평사동이 되었다. 1988년 진량면 평사리가 되었다가 1997년 진량읍 평사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인평사와 구분하기 위하여 들 평을 쓴다. 마을 가운데 4번지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지당(池塘)이라 불렀다. 옛날 이 연못에 물이 없으면 불이 난다고 하여 달비설이라고도 불렀다. 1977년 새마을 사업으로 매립하였고, 현재는 도롯가에 공터로 남아 있다.

 

▲ 하양 평사 원룸촌 

 

1912년 당시 하양평사에 43가구 살고 있었다. 현재는 마을 동북쪽 33번지 일대가 대구대학교와 가까워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고, 광무재와 여호와의 증인 경산회관, 롯데주류 등이 있다. 하양평사 서쪽 광무사라는 골짜기는 1959년 문천지 축조로 수몰되었다.

 

▲ 영천 평사 

 

평사1(平沙영천평사의 흔적

영천평사는 1653년 구사부곡에서 분리되어 영천군 창수면에 편입되어 영천군 창수면 평사동이 되었다(호구총수). 1911년 남성리와 통합되어 영천군 창수면 남성동(南星洞)이 되었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에서 동리를 통폐합할 때 남성동 일부인 평사동이 자인군 평사동과 통합되어 자인군에 속했다. 영천에서 편입되어 흔히 영천평사라 한다. 1914년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진량면 평사동이 되었고, 행정리는 평사1구였다. 해방 후 진량면 평사1동이 되었다가 1997년 진량읍 평사1리가 되었다.

 

▲ 자인 평사 

 

평사2(平沙자인평사

자인평사는 1653년 자인현이 구사부곡을 경주부로부터 돌려받은 후 평사동 3개 각단 중 가장 작은 각단을 자인현에 편입시킨 마을이다. 이후 자인현 북면 평사동이 되었다가 북면이 다시 상북면과 하북면으로 분리되었는데, 평사리는 하북면에 편입되었다(호구총수).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승격하면서 하북면이 중북면과 하북면으로 나뉘었는데, 이때 평사리는 하북면에 속했고, 하양평사와 구분하기 위하여 한자도 평평할 평을 써서 평사동(平沙洞)이라 기록하였다. 이후 1911년 영천군 창수면 평사동과 통합되어 자인군 하북면 평사동이 되었다. 그리고 1914년 영천군 금호면 남성동(南星洞) 일부가 또 자인평사에 병합되어 평사동이 확장되면서 진량면에 편입되었다(조선총독부 관보). 일제시대 평사2구가 되었다가, 해방 후 평사2, 1988년 평사2리로 바뀌었다. 현재 진량읍 평사2리다. 1911년 봉회교회에서 분립한 평사교회와 1969년 이임춘 신부가 설립한 진량성당 평사공소가 있다.

 

▲ 진량성당 평사공소 

 

▲ 평사리 지명 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산골재

 

▲ 광무사골 

 

평사리(하양평사)에는 서쪽 광무사(廣武寺)라는 사찰이 있던 광목사골이 대표적인 골짜기이고, 평사2(자인평사)에는 서쪽 당수나무 너머의 당너매’, 동북쪽 불뭇골논’, 동쪽 새못밑심성못밑’, 서쪽 자인평사 어귀 숲이 있던 숲골논’, 길억지못 북쪽 연지 못밑의 연못밑들’, 길억지못 밑의 지럭지못밑들등이 대표적인 논이었다.

 

▲ 돌고개 

 

평사1(영천평사)에는 동북쪽 영천 금호 남성동으로 넘어가는 돌고개’, 돌고개 남쪽 밤나무가 많았던 밤개등’, 동쪽 긴 등성이인 진등’, 진등 동남쪽 속에 있다 하여 속등’, 속등 동남쪽 야시굴(여우굴)이 있었다는 야시골’, 구릉배미 동쪽의 시굼밭골’, 남쪽 영천 사리동 한못의 매래 옆에 있는 매롯듬’, 달빗골 서쪽의 용암비알등이 대표적인 산과 골짜기였다.

 

▲ 구릉배미 

 

또 동남쪽 구렁에 있던 구릉배미’, 남쪽 지형이 소쿠리처럼 생긴 소구리배미’, 소구리배미 동쪽 밭둑이 있던 밭둑논’, 밭둑 곁에 있던 겉밭둑’, 밭둑 바깥에 있던 밧밭둑’, 북쪽 새못 안의 새못안’, 서쪽 지형이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매릇듬 남쪽 지형이 전대처럼 생긴 천대배미’, 용암비알 동남쪽 한못 위쪽의 윗들바지’, 용암비알 서쪽 섬안’, 남쪽 복판에 있던 중들등이 대표적인 논과 들판이었으나, 지금은 경지정리로 모두 잊혀진 상태다.

 

저수지

 

▲ 연지 

 

평사리 376번지에 있는 연화제(蓮花堤, 연지)’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등재되어 있는 오래 된 저수지다. 연꽃이 많아서 연지라 불렀다고 한다.

 

▲ 길억지 

 

527번지에 있는 길억지는 옛날 이 지역에 기러기가 날아들지 않았는데, 이 못을 축조하고 난 뒤부터 난데없이 기러기가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길억지또는 지럭지라 불렀다고 한다.

 

▲ 신지 

 

624번지에 있는 신지여지도서』 「영천군지편에 상동신제(上洞新堤)’라 등재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새로 못을 팠다고 하여 새못또는 신지라 불렀다고 한다. 길억지와 신지는 1518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 심성지 

 

평사리 14번지에 있는 심성지는 조선 후기에 축조되었다. 또 행정구역상 대창면 사리리 544번지에 있는 한제지는 조선시대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지지자료(1911)』 「자인군편에 대제(大堤)’라 등재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축조 당시 영남에서 제일 큰못이라 한대지(韓大池)’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한제지(韓堤池)’로 굳어졌다.

 

▲ 석곡지 

 

이외 312번지에 있는 돌곡에 있는 저수지는 골짜기 이름을 따서 석곡지라 불렀고, 평사1(영천평사) 50번지와 대창면 사리리에 걸쳐 있는 저수지는 마을 안쪽에 있다고 하여 내평지라 불렀는데, 한제지의 보조 못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상 2개의 저수지는 일제시대 이후 축조되었다.

 

▲ 광무재 현판 

 

창녕조씨 조순을 추향하는 광무재

평사리(하양평사) 서쪽 문천지가에 창녕조씨 조순을 추향하는 광무재(廣武齋)가 있다. 조순(曺詢, 16041672)은 상림리 죽원재에 배향된 창녕조씨 하양 입향조 조몽필(曺夢弼)의 손자이다. 재실은 문천지가에 있는 산 이름을 따 지었다고 한다. 옛날 이곳에 광무사(廣武寺)라는 사찰이 있어 광무산이라 칭했다. 전설에 의하면 광무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재실은 1974년 지었는데 정침은 4, 대문은 갑인문(甲寅門)이다. 현판은 조규인(曺圭寅), 광무재기는 조기출(曺琪出)이 썼다. 현재는 거의 폐쇄된 상태다.

 

▲ 평사교회 

 

 

신앙으로 맞선 침묵의 저항-평사교회 신사참배거부운동

 

평사교회는 1911년 봉회리 봉회교회(현 진량제일교회)에서 분립하였다. 1916년 평사동교회당으로 인가를 받았고, 담임목사는 미국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위철치(魏喆治, George H. Winn)였다. 처음 하양평사에 자리를 했다가 나중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일제 말기 일제는 전국의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당시 봉회교회 강만조 전도사가 상림교회와 평사교회를 오가며 강론하였다. 그런데 강만조 전도사가 다니던 봉회·상림·평사 교회 신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 평사교회 

 

▲ 김선암 지사 

 

▲ 유한곤 지사 

 

이에 일제는 봉회교회 김종철 장로의 집에 강만조 전도사가 작성한 신사참배 거부 관련 문건이 있다면서 압수 수색을 하면서 평사교회 간부였던 강선이(姜先伊), 김선암(金先岩), 유한곤(兪漢坤), 조달용(曺達用), 현준이(玄俊伊) 등을 체포하여 경산경찰서에 가둬 놓고 매일 밤 고문을 하였다. 당시 세 곳의 교회에서 체포된 교인은 17명이었다. 이들은 1944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으로 재판을 받은 뒤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다. 이러한 사연이 해방 후 199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김선암은 1996, 김종호와 현준이는 1997, 조달용과 유한곤은 1998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같이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던 강선이는 아직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조사 당시 강선이가 누락되었거나, 후손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에필로그

 

평사리는 한때 마진량현이었고, 구사부곡의 들판이었으며, 또 자인·하양·영천이 서로 욕심을 냈던 비옥한 땅이었다. 1653, 자인현민들이 되찾아 온 구사부곡의 땅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잘려 나갔다. 행정의 편의와 지역 유지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평사리는 셋으로 나뉘었고, 같은 이름을 가진 세 마을은 서로 다른 고을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은 나뉘지 않았다. 연지의 물은 함께 흘렀고, 길억지와 신지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논을 적셨다. 돌고개를 넘어 장을 보고, 같은 교회에서 기도하며, 같은 시대의 억압 앞에서 함께 버텼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평사교회의 교인들처럼 이 마을의 역사는 늘 작고 조용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늘의 평사리는 원룸촌과 공장이 들어서며 옛 모습에서 많이 달라졌지만, 한 마을이 세 개로 분리된 사연만큼은 아직도 이 땅의 결을 따라 남아 있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평사리 전경 
 
▲ 평사리 마을회관 
 
▲ 영천 평사 마을 
 
▲ 자인 평사 
 
▲ 자인 평사 
 
▲ 하양 평사 
 
▲ 하양 평사 
 
▲ 평사1리 마을회관 
 
▲ 평사2리 회관 
 
▲ 평사교회 
 
▲ 진량성당 평사공소 
 
▲ 길억지 
 
▲ 신지 
 
▲ 심성지 
 
▲ 연지 
 
▲ 연못밑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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