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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경산보인농악의 뿌리 보인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6) - 보인리

기사입력 2025-10-29 오전 9:01:12

▲ 보인리 전경 

 

 

프롤로그

경산 진량읍 보인리는 금호강 충적평야에 자리한 마을이다. 조선 후기 하양현 낙산면 보인동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인리와 벌음동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묘목과 농업이 발달했고, 예로부터 지신밟기와 농악이 전해 내려왔다. 이 전통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경산보인농악으로 이어져,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있다. 보인리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보인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보인리는 조선 후기 하양현 낙산면 보인동이었다. 호구총수(1789)에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후에 조성된 마을로 보인다. 19세기 중엽 정식 마을 보인리로 등재되었고, 1895년 하양읍이 하양군이 되면서 북쪽의 버티미(벌음)’를 합하여 하양군 낙산면 보인동이라 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마을을 통폐합할 때도 그대로 보인동으로 이어졌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진량면이 생기자 경산군 진량면 보인동이 되었다. 이때 행정동 개념으로 보인은 보인1, 버티미는 보인2구가 된 후로 현재까지 보인1, 보인2리로 이어지고 있다.

 

▲ 보인동(보인1리) 지적도(1912)

 

보인동(보인1)

 

▲ 보인1리 

 

보인동(甫仁洞)은 보인리 남쪽에 있던 자연 부락이었다. 전하는 말로는 이곳에 신라 때 보인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원인 모를 화재로 건물이 없어지고 터만 남았는데, 그 후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보인리(寶仁里)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교적인 색채를 없애기 위해 보인리(輔仁里)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한자를 간략화하여 보인리(甫仁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 전국의 마을 이름을 기록한 호구총수에 보인리가 등재되지 않아 이러한 유래는 민간어원설로 보인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작성한 조선지지자료(1911)에는 보인동(甫仁洞)으로 적고 있어 일본인이 한자를 바꾸었다는 설도 일제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한 어원설로 보인다. 1912년 당시 25가구가 있었다. 현재 보인1리이며, 마을에는 포도, 복숭아 등을 재배하고, 벼농사도 짓고 있다.

 

▲ 벌음(보인2리) 지적도(1912)

 

벌음동·버티미·앞번답·앞버티미(보인2)

 

▲ 보인2리 

 

벌음동(伐音洞)은 보인동에서 북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만세량봇도랑 위에 있다. 원래 버티미라 하였는데, 기록하는 과정에서 벌음동이라 하였다. 이 마을의 유래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이전에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버티미라고 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대조리의 번답 앞에 있다고 하여 앞번답, 앞버티미라고도 불렀다. 셋째는 옛날 버드나무와 잡초, 갈대 등이 우거져 있어 주거지로 적당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잘 버티고 살아서 버티미라고 불렀다는 설이다. 이 셋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유래는 두 번째이다. 왜냐하면, 1912년 지적도를 보면 이곳에 숲은 없고 모두 논밭으로 되어 있으며, 하양 대조리의 번답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번답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마을 조성은 19세기 말로 추정된다. 1912년 당시 약 5가구, 1920년대 26가구, 1960년대 50여 가구, 현재는 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뽕나무밭이 많았고, 일제시대에는 뽕나무 묘목과 사과 농사를 많이 지었다. 해방 후에도 묘목 농원으로 유명하여 경산종묘특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보인2리다.

 

▲ 보인리 지명 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 보인1리 살구배미들과 상시랑들 

 

보인리는 금호강 충적평야 가운데 있어 산과 골짜기가 없다. 마을 전체가 평야 가운데 있어 예로부터 논과 들판 이름이 많았다. 보인 마을의 대표적인 논은 보인리 북쪽 땅이 나빠서 조금만 가물어도 벼가 살구빛처럼 되었다는 살구배미, 남쪽 버덩에 있던 버등지, 버등지 남쪽 보인사 논이었다고 하는 인배미, 서남쪽 지형이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상세량보의 물을 받던 상세량들, 상세량들 동남쪽에 있던 정랑배미, 서북쪽에 있던 대조들, 동남쪽 천둥지기였던 봉답들, 서쪽 땅이 좋지 않은데도 쌀이 많이 났다는 사르리들 등이 있었다.

 

▲ 벌음동 중부래들 

 

버티미 마을의 대표적인 논은 서남쪽에 있던 중부래, 동남쪽 지촛배미, 지촛배미 북쪽 흉년에 호박을 주고 이 논을 얻었다는 호박도가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에 관한 이름은 경지정리와 세월의 흐름 속에 거의 다 잊혀졌다.

 

▲ 만세량봇도랑

 

보인리는 금호강에 둑을 쌓아 만든 만세량보(현 금호보)의 물길이 마을을 가로질러 흘러간다. 그래서 물을 막아 논에 물을 대던 보도 많이 있었다.

 

▲ 만세량봇도랑

 

대표적인 보()는 사르리들에 있던 사르리도랑, 사르리들 동쪽 큰 봇도랑을 갈라서 새로 냈다 하여 보새끼도랑, 보인동 남쪽 선화리 만세량보 위쪽이라 하여 상세량보, 버티미마을 동쪽에서 상림리로 넘어가는 배슷도랑, 고부다리 남쪽의 구도랑, 보인 동쪽 새로 낸 봇도랑이라 하여 새도랑 등이 있었다. 이러한 보들도 벼농사를 짓지 않은 관계로 현재는 그 효용성을 잃어버렸다.

 

▲ 고부교가 있던 곳

 

이외 어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큰 돌로 다리를 놓았다는 고부교, 구도랑에 놓인 구도랑다리(보인1), 보인동과 부기동 경계에 있던 뱃나드리 나루터, 조개듬뱅이 옆에 있던 조개듬뱅나루 등이 있었으나 개발로 모두 사라졌다.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이종호 지사

 

▲ 이종호 지사 

 

한편, 이 마을 출신인 이종호 씨(1922~2011)1943년 당시 22세의 청년으로 상림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일제 말기 일본은 기독교인에게도 일본 신사를 참배하라고 강요하였는데, 진량봉회교회 전도사 강만조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에 강만조 씨가 전도하던 상림교회의 간부들을 체포하였는데, 이때 이종호 씨도 함께 체포되어 1년간 구금당한 후 풀려났다. 당시 체포된 기독교인은 17명인데, 이종호 씨가 가장 어렸다. 이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그는 1997년 건국포장을 받았다(상세한 내용은 봉회리 편 참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경산보인농악단

 

이러한 마을에 예로부터 전승되던 지신밟기 농악이 현대적으로 변형되어 농촌문화의 한 자리로 자리 잡아 계승되고 있다.

 

▲ 경산보인농악단 

 

보인리에는 예로부터 섣달그믐날 마을 성황당에서 대내림을 받아 동제를 지낸 후 정월 대보름날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하였다. 이때 마을 주민들은 농악을 울리며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영향과 가치관의 변화로 보인리의 지신밟기와 농악은 1970년대부터 중단되었다.

 

▲ 보인농악단 자인 계정숲 공연 

 

그러다가 1990년대 박순범 교사가 악보를 만들고, 1970년대 지신밟기에 참여했던 주민들을 규합하여 진량 부림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농악을 전수시켰다. 그런데 당시 농악은 시위에 많이 이용되었던 시대라서 학부모들의 반대로 교육이 중단되었다. 또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사원들에게 농악을 전수시켰지만, 이 또한 부정적 인식으로 중단되었다.

 

▲ 보인농악단 공연 모습 

 

그 후 2007년 경산시 농악 보존연합회가 결성되면서 다시 규합되어 2008년 경북 농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10년 뒤 201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경산보인농악단은 한 마을에서 전승되는 농악이 무형문화재로 등재될 정도로 의미있는 문화재이다.

 

▲ 보인농악단 공연 모습 

 

이 농악은 경상북도 남부지방의 모의농사굿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또 섬세한 판굿가락과 빠른 자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장단과 덧배기장단이 주를 이루어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인농악의 진짜 매력은 글자를 춤추게 한다는 데에 있다. 이들은 논과 밭, 흙과 물, 그리고 농사짓는 사람의 손길까지 한자 모양으로 그려낸다.

 

 흙토()자굿

 

먼저 흙토()자굿에서는 넓게 펼쳐진 논의 형상을 흙으로 그려내듯, 장단에 맞춰 발을 구르고 북채를 흔들며 땅의 기운을 깨운다. 농부가 봄갈이를 시작하듯 흙을 다지고 일구는 동작 하나하나에 생명의 숨결이 스며들고, 땅의 온기와 사람의 손맛이 어우러져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면이 힘차게 펼쳐진다.

 

 물수()자굿

 

이어지는 물수()자굿에서는 물길이 논두렁을 타고 흐르듯, 장고의 장단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허리를 굽히고 팔을 펼치는 동작마다 물이 흘러들고, 삶과 생명의 기운이 흙 속으로 스며든다. 대지 위를 적시는 물의 리듬은 농부의 노래가 되고, 논과 사람, 그리고 하늘이 하나 되는 순간을 그려낸다.

 

 밭전자()자굿

 

밭전자()자굿은 네모난 밭을 그리며 펼쳐진다. 줄을 맞춰 서서 손을 뻗는 모습은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농부의 일상, 그 평범한 움직임 속에 노동의 미학이 담겨 있다. 장단에 맞춰 밭의 윤곽을 그려 나가는 모습은 마치 글자가 살아 움직이듯, ‘()’자가 굿판 위에서 완성된다.

 

 곰배정()자굿

 

마지막 곰배정()자굿은 한 해 농사를 마친 뒤 논밭을 갈아엎고 곰배로 보리를 심는 농부의 손끝처럼, 춤꾼들의 발끝이 흙을 다지며 새 희망을 준비한다. ()자 모양의 대형 속에서 사람과 땅이 다시 하나가 되고, 풍년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북소리로 울려 퍼진다.

 

이렇듯 글자를 형상화한 보인농악의 연희는 땅의 기운과 사람의 노동이 하나 되어 춤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며,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보인농악만의 예술적 자부심이다.

 

▲ 역대 상쇠(AI 리믹스 이미지)

 

경산보인농악대를 이끄는 사람은 상쇠라 한다. 1대 상쇠 이동개 씨는 모내기와 논매기에서 농사굿을 착안, 구전으로 전하던 보인농악을 현재와 같이 12마당으로 정립했다. 2대 상쇠 김판언 씨 때는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보인농악을 전국에 알렸다. 3대 상쇠 이융신 씨는 각종 행사에 초청되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중단되어 버렸다. 2000년대 중반 제4대 상쇠 임두식 씨가 진량보인농악단을 창단하여 명맥을 잇고자 했으나 2010년 해체되었다. 그후 1, 2대 박용호 회장이 사재를 투입하여 경산조폐공사 농악 동아리와 진량 한성레미콘 직장인, 하양문화원 단원들로 구성된 보인농악대를 재정비하였고, 현재 제5대 상쇠 김대근 씨가 농악대를 이끌고 있다.

 

▲ 이진우 회장 

 

▲ 이상기 단장 

 

▲ 김대근 상쇠

 

2024경상북도 무형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현재는 경산보인농악보존회이진우 회장, 농악단 이상기 단장을 비롯하여 제5대 상쇠 김대근 씨와 경산 지역 단원들이 경산보인농악을 이끌고 있다.

 

▲ 2025년 정기공연 -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에필로그

 

보인리는 금호강 평야의 너른 들판과 함께 농악의 전통을 이어온 마을이다. 세대를 거쳐 전해진 보인농악은 마을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 정신을 담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마을 단위를 넘어 경산 지역을 대표하는 무형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보인리는 전통문화의 뿌리와 정체성을 간직한 마을로, 앞으로도 그 가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보인1리 마을 전경 
 
▲ 보인1리 마을
 
▲ 보인1리 새마을회관 
 
▲ 보인2리 마을 전경 
 
▲ 보인2리 마을 
 
▲ 보인2리 회관 
 
▲ 보인리 들판 
 
▲ 사르릿들인배미 
 
▲ 살구배미
 
▲ 호박도가니 
 
▲ 벌음동 중부렛들
 
▲ 만세량봇도랑
 
▲ 버둥지
 
▲ 고부교가 있던 곳 
 
▲ 경산보인농악단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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