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전시관
- 글
압독국 부활을 꿈꾼 십장수(十將帥) 전설이 숨겨진 신대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4) - 신대리
기사입력 2024-10-08 오전 8:58:33
▲ 신대리 전경
◆ 프롤로그
흔히 믿으면 현실이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어떤 염원을 잊지 않고 이룰 수 있다는 믿음만 있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압독국 멸망 후 압량인들이 압독과 압량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압량면’이 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압독국의 도읍지 근처 천마봉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산에 압독국 부활을 염원한 이야기가 최근까지 전하다가 지금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이 묻힌 이야기를 다시 소개함으로써 압독국의 부활을 꿈꿔 본다.

▲ 신대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신대리(新垈里)는 『호구총수(1789)』에는 등장하지 않고 『경산현지(1832)』에 처음 보이는 마을이다. 그러나 압독국 시대 도읍지였던 압량촌에 속한 작은 각단 구박곡(具朴谷)으로 천수백 년 동안 존재하고 있었다. 압독국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는 압독주 압량촌 구박골이었고, 665년(문무왕)경에는 삽량주 압독군 압량촌 구박골이었다. 그 후 757년(경덕왕)에는 양주 장산현 압량촌 구박골이었다. 940년경 장산(獐山)이 장산(章山)으로 바뀔 때 장산군 동계 압량촌 구박골이었다. 1308년경 장산이 경산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경산현 동면 압량촌 구박골이 되었다. 1800년대 초반 구박골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1832년 경산현 동면 신대리가 되어 압량리에서 벗어났다.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이 되면서 경산군 동면 신대동이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압량면을 신설하면서 경산군 압량면 신대동이 되었다. 이러한 체계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다가 1988년 신대리, 2020년 압량읍 신대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구박골, 초성골, 신대 3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 1912년 신대리 지적도
▲ 구박골 전경
▲ 구박골
구박골은 압독국 시대 구씨와 박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는 성씨가 없던 시대이므로 후대에 윤색된 유래설로 보이고, 원래 이름은 담티비알, 메르띠로 불렀다. 어쨌든 이 구박골에는 압독국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고, 당시는 압독국 도읍지 근처에 속했다. 그 뒤 마을이 없어지고 밭이 되어 ‘구밭골’이 되었고, 현재는 공장이 들어서 있다.
▲ 초성골 전경
▲ 초성골·초성곡(草盛谷)·초현곡(草賢谷)
구박골에 살던 사람이 치두산(雉頭山)이라 부르는 꽁머리산 서북쪽에 이주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 풀만 많이 있고 황무지였다고 하여 초성이라 불렀다 하고, 각단의 모양이 초생달을 닮아 초성골이라 했다고 한다. 실제로 꽁두산 가장자리로 마을이 생겨 초생달을 닮은 꼴을 하고 있다. 19세기 초까지 압량동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다. 1912년 당시 이 초성골에는 14가구가 살았고, 마을 가운데 작은 웅덩이도 있었다. 방씨들이 살았다고 한다.
▲ 신대리 전경
▲ 신대
신대는 현 신대리 서북쪽과 부적리 동쪽 부적태서리라는 들판에 있는 야산과 압량리 남쪽 야산 기슭에 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시기는 17∼19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정식 마을로 등재된 것은 『경산현지(1832)』부터이다. 새로 마을 터를 닦았다고 신대라 하였다. 마을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이 지역의 중심 마을이 되어 마을 이름도 신대리(新垈里)가 되었다. 1912년 당시 29가구가 살았다. 원래 옥산전씨들이 주로 살았다. 현재는 신대 남쪽 들판과 가장골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마을 동쪽으로는 큰 공장이 들어와 초라한 옛 마을로 전락하였다. 언제 개발로 없어질지 모른다.

▲ 신대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초성산과 대추밭말래이 전경
▲ 천마봉 전경
신대리에는 서남쪽 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꽁두산 또는 치두산이 있다. 이 산은 초성산(草城山)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 옆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대추밭말랭이라 부르는 산도 있다. 또 신대2리 동남쪽 천마봉(天馬峰)이라 부르는 산도 있는데, 지금은 거의 밭이나 공장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 외실골 전경
골짜기로는 힘센 장사 열 사람이 살았다고 하며, 그곳에 있는 샘의 물을 먹으면 힘이 세어졌다고 하는 십장골, 십장골 남쪽에 외실골, 신대 남쪽 큰가장골과 작은가장골, 초성골 남쪽 구밭골 등의 골짜기가 있었다. 가장골 동쪽에는 큰웅딩이도 있었다. 또 갑제리 갑제못밑이라 하여 가못밑들, 큰부리 등의 들판이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논에 관한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 신대리 가못들판
특히, 가못밑들은 남쪽 갑제리 갑제지에서 내려온 물을 받아 농사를 지었다. 이 들판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시내가 두 개 있었다. 중앙에서 압량리로 빠져나가는 시내를 큰도랑이라 하였고, 동쪽에 치우쳐 역시 압량리로 빠져나가는 시내를 작은 도랑이라 하였다. 이 두 도랑에 가분뎃도랑, 서채도랑, 마랫도랑 등 보를 설치하여 가못밑들판의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큰도랑을 좀더 크게 확장하여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게 하고 나머지 작은도랑은 그대로 두었다.
▲ 경산압량초등학교
▲ 신대리 아파트단지(이곳에서 조선시대 유물이 발견됨)
또한 마을이 도시화하면서 부적리에 있던 압량초등학교가 신대리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경산압량초등학교라 한다. 이곳을 개발하려고 할 때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로 추정되는 대량의 고분과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 신대리 유적
.png)
▲ 신대리 조선시대 유적지(성림문화연구원)
.png)
▲ 신대리 발굴 조선시대 도자기류(성림문화연구원)
2008년 신대리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섰다. 형질 변경을 위하여 지질 조사를 한 결과 이곳에 원삼국시대 목관묘·토광묘·옹관묘와 통일신라시대 석실묘·석곽묘, 고려시대 석곽묘·토광묘, 조선시대 토광묘·수혈·우물·암거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원삼국시대의 유물은 토기류·석기류·철기류·청동제유물·유리·보석류 등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은 토기류가 대부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유물은 청자접시·대접·철게가위·고려동경 등이었다. 조선시대의 유물은 백자대접·철곳·청동숟가락 등 420여 점이 있었다. 이로써 이 신대리 일대에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람들이 집단으로 살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십장골 전경
◆ 장사 열 사람이 살았다는 십장골
이러한 마을에 십장골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 열 사람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십장골은 초성골 서남쪽 천마봉(天馬峰)에 있는 골짜기다. 장사 관련 이야기는 흔히 ‘아기장수’로 대변되는 이야기류가 많다. 원래 이야기에는 힘이 센 아기장수 혼자가 등장하는데, 신대리 십장골 전설은 무려 10명이 등장한다.
▲ 공장이 빽빽하게 들어선 십장골
이야기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옛날 압독국이 신라에 망한 뒤 압독국 장군들은 거의 다 죽임을 당했는데, 이 장군들의 아들 10명이 신대리 초생골로 숨어들어와 살았다. 이들은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점차 힘센 장사로 성장했다. 이들이 장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골짜기에 샘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샘물을 먹어서 힘이 장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골짜기를 열 명의 장사가 산다고 하여 십장골이라 하였다. 성장한 열 명의 장사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압독국을 재건하려고 옛날 압독국에 속했던 치성화현, 노사화현, 마진량현 등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드디어 거사일을 잡고 십장골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갔나 하고 그를 기다는데, 갑자기 신라 군사가 들이닥쳐 기다리던 장사 9명을 죽였다. 이들이 기다리던 한 명의 장사가 신라군에 매수되어 배신을 하였던 것이다. 이 9명의 장사가 죽자 골짜기 옆의 나지막한 산에서 갑자기 용마 10마리가 울면서 하늘로 올랐다. 신라군은 용마를 향하여 활을 쏘았지만 한 마리만 맞고 떨어져 죽고 나머지 9마리는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장사 9명을 죽인 신라군은 배신한 1명도 마저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10명의 장사가 마셨다는 샘물을 돌과 흙을 채워 메워버렸다. 그 후 이들이 살던 골짜기를 십장골이라 부르고, 용마가 울면서 승천한 산은 천마봉이라 했다고 한다(한국의 구전설화, 평민사).
◆ 에필로그
이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전승하는 ‘아기장수와 용마’ 전설의 모티브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이곳에서 전승되는 이유는 바로 압독국 시절을 그리워하는 압독 백성들의 염원과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심리적 보상을 받으려는 차원에서 아기장수 모티브와 연결하여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런 설화가 이곳에 전승되면서 압독 주민들의 뇌리에는 늘 압독국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경이 1914년 압량면의 재탄생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이 골짜기에는 각종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십장수 이야기를 더욱 짓누르고 있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jpg)
.p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