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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실’을 부르며 일궈낸 압량인의 삶의 터전과 문화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2) - 삶의 터전과 문화
기사입력 2024-09-25 오전 8:59:32
▲ 압량읍내 전경
◆ 프롤로그
압량인은 기원전부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압량인의 문화를 전승해 왔다. 농사를 짓기 위하여 축조한 저수지와 땅을 일궈 저수지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던 들판과 논이 대표적인 압량인의 삶의 터전이다. 이 터전 위에서 ‘백실’이란 노래를 부르며 먹거리를 생산한 압량인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도 생산·발전·발전승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 시설도 만들고,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재실도 만들었다. 교통과 통신을 위한 길을 닦고, 역도 만들었다. 그리고 먹거리를 교환하기 위한 장터도 만들고, 상상력이 빚어낸 예술도 창작하여 전승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들의 삶의 흔적들이다.
◆ 손으로 일군 압량인의 삶의 터전
▲ 압량인의 먹거리 터전 논·들·밭
압량은 용성에서부터 시작된 오목천이 북쪽 금호강을 향해 흐르면서 하천 주변에 모래, 자갈, 진흙 따위가 쌓여 생긴 충적평야 하류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오목천 좌우로 형성된 넓은 벌판에 압량인들은 구석구석 농경지를 조성하여 사람처럼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놓았다.
▲ 부적들판
▲ 압량들판
▲ 신대들판
부적·압량·신대리는 과거 압독국의 도읍지와 인근 지역이다. 부적리에는 마못밑들, 미통들, 부적태서리, 수링잇들[소년봇들], 신대앞들, 압역걸 등이 있었고, 압량리에는 자배미, 장구배미, 칼치도가리, 횃대배미, 갯밭들, 꽁못안들, 들누깃들, 사문깐들, 압리들 등이 있었다. 신대리에는 가못밑들, 큰부리 등의 들판이 있었다.
▲ 건흥들판
▲ 용암들판
▲ 금구들판
현흥·용암·금구리는 오목천 북쪽 넓은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 논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현흥리에는 구름번답, 양산지고래, 장구배미, 진배미 등의 논과 건흥들[고롱들], 고랫들, 두란들, 말무덤들, 배미들, 새바대들, 생골들, 영장늪들 등이 있었다. 용암리에는 장구뱀, 줄부리논, 진상구, 횃대배미 등이 있었고, 금구리에는 둘안들, 앞갱븐 등이 있었다.
▲ 인안들판
▲ 의송들판
▲ 신촌들판
인안·의송·신촌리는 오목천 북동쪽에 위치하여 논이 많았다. 인안리에는 갈매배미, 두룽배미, 마당배미, 멍에배미, 밭밑논, 버선배미, 비선짓배미, 새논, 질배미, 콩논, 파래배미, 홈걸배미, 활배미, 황토배미 등의 논과 섶도랑들, 숲밧거리, 안태설이라는 밭이 있었다. 의송리에는 마당배미, 실겅배미 등의 논과 상동못밑들, 약숫골못밑들 등의 들과 누불못밑이라는 밭이 있었다. 신촌리에는 기부골, 밭전, 섬배미, 영삼논, 워나무고래, 투구고래, 횃대배미 등의 논과 바늘들, 중보안들 등의 들이 있었다.
▲ 내리들판
▲ 가일들판
▲ 당음들판
내리·가일·당음리는 오목천 남쪽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내리에는 갯밭들, 가일에는 생고못밑들 정도가 있었고, 당음리에는 장구배미, 횃대배미, 잔골논, 큰갓골논 등이 있었다.
▲ 신월들판
▲ 백안들판
▲ 강서들판
▲ 당리들판
신월·백안·강서·당리리도 오목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인데, 신월리만 안쪽에 있다. 신월리에는 굴못안, 숫거리, 아릿숫거리, 우묵다리부리, 웃숫거리 등의 논과 큰부릿들이 있었다. 백안에는 굼논과 백안갯들 정도가 전하고, 강서리에는 굼논, 비개산구, 삼밭도가리, 조산배미 등의 논과 비석거리라는 밭이 있었고, 당리리에는 단오사래, 장구배미, 횟대배미, 진골논, 큰갓골논 등의 논과 한살들[대평], 마릿도랑들, 중봇들 등의 들이 있었다.
과거 벼농사를 짓던 이러한 논과 들판은 현재 수익성이 높은 대추, 복숭아, 포도, 참외 등을 생산하는 밭이나 하우스로 많이 바뀌었다. 특히, 압량은 대추, 포도, 참외 등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순우리말로 된 압량의 논과 들판 이름이 이제는 주민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 압량인의 삶의 젖가슴 저수지와 보
저수지는 물을 저장하여 수로를 통하여 농지로 내려보내 농사를 짓는 중요한 수리시설로 흔히 아이를 키우는 여인의 젖가슴에 비유된다. 지금까지 저수지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이하 속찬지리지)와 『여지도서(1765)』 및 각종 현읍지 등이다. 조선은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각 군현의 저수지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따라서 자료에 등재되지 않은 저수지는 당시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 당음지(금막제) 전경
『속찬지리지』에 등재된 압량읍 소재 저수지는 당음리의 금막제(今幕堤, 현 당음지)와 신월리의 진군제(鎭軍堤) 또는 군제(軍堤, 현 구지), 인안리의 사제(?堤, 현 입지) 등 세 곳이다. 이들 저수지는 멀리 원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속찬지리지』에는 없고 『여지도서』부터 등재되어 15∼18세기 사이 축조된 부적리의 부적제(현 마위지), 현흥리의 건흥제(현 연지), 의송리의 침법제, 당리의 기리제가 있다.
▲ 마위지(부적제) 전경
현읍지 등 조선시대 자료에는 없지만 1912년 지적도에 있는 부적리의 신지(268번지, 매립), 압량리의 만줏골못(147번지, 매립), 의송리의 무명지(4번지, 매립)·약수지(130번지), 가일리의 운문지(생골못, 464번지), 당음리의 정상지(534번지), 신월리의 신지(265번지)·원주지(256번지)·무명지(258번지) 등은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 부적리의 석정지, 의송리의 동신지(상동못), 신월리의 갓골못·호산못·신풍지·선항지·율곡지, 당리의 옹탕못(매립) 등은 모두 1910년대 이후 축조되었다. 한편, 의송리의 침법제와 인안리의 사제(?堤)는 조선시대 자료와 근대 자료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저수지들은 과거 벼농사를 할 때 많이 필요했는데, 현재는 복숭아, 대추, 포도 등 작목이 바뀌는 바람에 용도를 상실하고 낚시꾼들의 세월 낚기에만 이용되고 있다.
◆ 압량인의 삶의 흔적
▲ 각종 고분 흔적
▲ 부적리 고분군
▲ 임당동 고분군
압량 지역의 문화는 거의 고대국가였던 압독국 시대와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전 압독주 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용성와 자인 등지에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의 무덤과 유물은 압량 지역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용성과 자인, 남산 지역에 살던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이곳 압량 지역으로 이주해서 고대국가 압독국 건국의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국가였던 압독국 유적은 주로 고분 형태로 남아 있다. 부적리 331번지 약 6기, 신대리 원삼국시대 고분, 내리 389번지 6기, 인안리 88번지, 의송리 고분, 당음리 지역 2기, 금학리와 과거 압독국 영역이었던 임당동, 하양 도리, 양지리 등에 산재해 있다.
▲ 김유신 장군의 통일 염원이 서린 흔적
현재 압량읍 내에 남아 있는 김유신 장군의 흔적으로는 저수지와 병영유적 등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은 서기 642년 압독주 군주 및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백제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4년 후에는 압독주 도독이 되어 이 지역에 침범한 백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김유신은 서기 642∼648년까지 압량에 ‘하주정(下州停)’이란 부대를 주둔시키고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백제와 전쟁을 준비하면서 남긴 당음리의 금막제(현 당음지), 신월리의 진군제(군제, 현 구지) 등의 저수지와 압량리의 우물터, 압량리·내리·진량읍 선화리의 병영유적 등이 당시의 흔적으로 아직 남아 있다.
▲ 진군제(구지) 전경
▲ 압량리 병영유적
특히, 병영유적은 ‘두룩산’이라 부르는데,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훈련장으로 굳어져 경산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외 당곡리에 있는 ‘당산[당당산]’도 그 모양이 선화리의 두락산과 닮아있어 이 또한 군사들이 훈련하던 연병장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이것이 연병장으로 판명되면 압독군 시대 김유신 장군이 압량리, 내리, 선화리, 당곡리 등 금호강과 오목천 주변 강을 따라 군사들을 주둔시킨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는 데 결정적 자료가 될 것이다.
▲ 압량인을 교육한 교육기관
▲ 현흥초등학교
▲ 경산압량초등학교
▲ 압량중학교
근대 이전 교육기관으로는 서당이 대표적인데, 압량에는 서당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대신 현흥리, 가일리, 내리, 신월리에 있는 재실이 묘사재를 겸한 서당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근대 이후 교육기관으로는 일본인 학교 육향공립심상소학교가 1913년 용암리에 개교했다가 1917년 현흥리로 이전했다. 해방 후 ‘압량북부’로 바꾸었다가 1956년 ‘현흥’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학교 안에 연대를 알 수 없는 입석 1기도 있다(『경산군지』). 1928년 부적리에 조선인 학교 압량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압량초등학교는 2017년 경산압량초등학교로 변경하여 신대리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2017년 압량중학교가 개교하였다.
▲ 유교문화의 상징 압량의 재실
조상을 추향하는 유교문화의 상징인 재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재실로는 현흥리의 애련정, 내리의 긍구정, 가일리의 모원정, 신월리의 영모재다. 애련정은 정응지가 건흥지를 축조한 후 학문 탐구와 후학을 양성하다가 그의 사후 재실로 이용되었다. 긍구정은 탁영 김일손의 종형인 김한손(1456∼1518)이 음풍농월하던 곳으로 그의 사후 재실로 사용하였다. 모원정은 순천인 이지효를 추향하기 위한 강학소겸 묘소재였다. 그는 임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영모재는 밀성박씨 박란과 박춘발 양세를 추향하는 재실로 1927년 건립하였다.
▲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 동제
▲ 백안리 당나무
동제는 주로 당나무로 불리는 마을 입구 큰 나무 아래에서 행하거나, 산에 당집을 지어 행하기도 하였다. 이 동제는 불교나 유교와는 다른 토속 신앙인 무속에 근거하여 전승하다가 외래 종교인 불교·유교와 융합하면서 그 형식과 절차가 변하였다. 그렇지만 본질적 굿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다. 압량읍 각 마을에도 형성 초기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으로 점차 폐지되면서 지금은 거의 지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부적리 당목에서 지내던 별신굿 형태의 동제, 의송리 당목에서 지내던 동제, 강서·백안·당리리 당목에서 지내던 동제는 최근까지도 행해졌다. 이외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당산에 제를 지낸 당리리의 당산제도 있었다.
◆ 집단가요 ‘백실’을 부르며 풍류를 즐긴 압량인의 예술
압량의 음악으로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김유신이 군무에는 관심 없고 술을 마시고 악을 즐겼다’고 하면서 ‘음주작악(飮酒作樂)’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고유명사인지 문장인지 확실치 않으나 당시 압량에는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던 놀이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대동운부군옥』에서는 하나의 ‘악(樂)’으로 기록해 놓았다.
또 『삼국사기』 잡지(雜志) 악조(樂條)에는 압량군의 음악으로 「백실(白實)」이라는 노래가 있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전하지 않는다. 같은 내용이 『증보문헌비고』에도 옮겨져 있다. 「백실」은 압량군의 악(樂), 즉 압량을 대표하는 군악(郡樂)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 노래는 압량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기기 위해서 만든 집단가요로 압독국 시절부터 전승하다 고려 때 노래 제목만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 압량에는 민요도 전하는데, 주로 모심기노래 등 논농사와 관련한 노래가 많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6년 ‘압독민요대전’이 경산시민의 날에 개최되기도 하였다. 또한 압량리의 ‘마르지 않는 샘물’ 등 전설과 민담 등이 최근까지 전승되었으나 이제는 거의 잊혀지고 몇몇 자료에 문자로만 남아 있다.
◆ 에필로그
압량인의 삶의 터전이었던 논과 들판 하나하나의 이름은 압량인들이 생활 현장에서 지은 이름으로 순우리말이 대부분이다. 신라 경덕왕이 한화정책을 펴면서 모든 인명, 지명, 관직명을 한자로 바꾸었고, 그 뒤 중국 중심 사고관에 의해 무조건 한자로 바꿔 기록하던 지배층들도 이러한 논밭 이름까지는 관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4년 압량면 당리리에서 처음 시작한 경지정리 사업으로 수백 년 동안 있었던 순우리말 들판 이름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압량인들이 수천 년 동안 짓고 지켜온 아름다운 땅 이름을 우리 스스로 버리고 말았다. 빼앗긴 것은 되찾을 수 있지만 스스로 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옛것을 소중히 여긴다면 경산시가 앞장서서 지금이라도 들판이나 논에 각각의 이름을 적어 표시해 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사진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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