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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교주 최제우의 시신이 머물렀던 신천동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동지역 편(13) - 신천동(1)

기사입력 2024-06-28 오전 9:41:51

사람들의 믿음은 무엇을 근거로 할까? 플라톤이 언급한 것처럼 지식의 판단을 근거로 하는가? 과학적 경험이나 증명에 근거하는가? 사회·정치적 신념에 근거하는가? 종교적 신심에 근거하는가? 게다가 사실이나 진실하다는 것은 또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인가? 달나라에 토끼와 항아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수천 년 동안 사실이나 진실로 여겨왔다. 우주선을 보내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은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한순간 한순간 증명 가능하여 믿는 것보다는 증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이런 것을 과학이라는 잣대로 비현실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지만, 어떤 신이한 이야기가 200여 년 전 신천동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사실로 확산되어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 신천동 전경 

 

▲ 신천동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신천동(信川洞)은 조선시대 자인현 서면 남방동 용어디미라 부르던 작은 각단이었다. 19세기 중엽 경산현 평산동 일부가 자인현에 편입되면서 자인현 서면 평산동에 속했다. 그 후 점촌동의 옹기가 유명해지면서 가구가 늘어났고,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승격하면서 평산동에서 분리되어 정식 행정 마을 신천동이 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도 자인군 서면 신천동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압량면이 신설되었는데, 이때 압량면에 편입되어 경산군 압량면 신천동이 되었다. 1989년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할 때, 경산시에 편입되어 경산시 신천동이 되었고, 현재는 경산시 동부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이 마을은 크게 신천(신내·메노나이트), 건네마을, 붕디미 등 3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졌다. 붕디미는 원래 신천동이었는데, 지금은 점촌·신천·평산동에 얽혀 있다.

 

▲ 1911년 신천동 지적도 

 

▲ 신천 전경 

 

신천·신내

신천(信川)이나 신내는 모두 마을 뒤 북쪽에 흐르는 시내에서 명명되었다. 이 마을 이름은 자인현읍지에 등재되지 않다가 조선지지자료(1911)에서 처음 등재되었다. 이로 보아 1895년 자인 평산동에 속한 작은 각단이 정식 행정 마을로 승격될 때 신천동이란 마을 이름을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마을 이름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하나는 남쪽 대은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와 마을 뒤쪽 용어등산(龍魚嶝山)이 서로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사이로 개천이 흐르면서 두 산을 갈라놓았는데, 그래도 변함없이 믿고 사랑하는 관계라는 의미에서 믿을 신을 써서 신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마을 뒤를 흐르는 시냇물은 변함이 없다고 하여 믿을 신을 써서 신천이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 신천은 신천동의 중심 마을이다. 흔히 새 신인 줄 알고 짧게 발음하는데, ‘믿을 신이므로 [:]이라고 길게 발음해야 한다.

 

건네마을

 

▲ 신천교회가 있는 건네마을 전경 
 

 

건네마을은 말 그대로 강 건너 있는 마을이다. 현재 시냇물은 평산 선돌배기 마을에서 경산자인 간 도로 쪽으로 향하다가 용어더미를 휘감아 남방리 쪽으로 향하지만,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선돌배기 마을에서 곧바로 붕디미와 신천마을 바로 뒤를 지나 용어더미 한쪽을 휘감아 돌아서 남방 쪽으로 흘렀다. 이렇게 새 물길이 생긴 이유는 홍수 때문이었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1937년 경산·자인 일대 큰 홍수가 났던 사진이 희재 황기식 선생의 사진첩에 남아 있다.

 

▲ 1937년 자인 동부1리 수해 현장 모습 
 

 

그래서 1950년대까지 구 물길과 신 물길이 공존하다가 이후 원래 물길은 막히고 새 물길만 현재 남아 있다. 원래 물길은 논밭으로 바뀌었다. 새 물길이 생기기 전인 일제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강 건너에 주막을 비롯한 몇 가구 있었다. 이 각단을 건네마을이라 하였다. 현재 신천교회가 들어선 주변 지역이다.


 

▲ 1911년 지적도(물길이 마을을 바로 뒤를 지나고 있음)

 

▲ 1954년 항공사진(물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음)
 

 

메노나이트·메나나이트

신천동을 한때 메노나이트라고도 불렀다. 신천동 북쪽 1953년 미국 기독교 단체인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이 여기에 메노나이트직업학교를 설치하여 많은 사람이 교육받았다. 그래서 이 기독교 종파 이름을 따 신천동을 메노나이트 또는 사투리로 메나나이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신천동 본래 동네가 아니라 북쪽 깐치골 일대가 메노나이트다.

 

 

삶의 터전과 흔적

 

골 및 들판

 

▲ 신천동 용어더미에서 바라본 백자산 줄기 
 

 

신천동은 남쪽 백자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끝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는 별로 없다. 산은 남쪽 대은산에서 내려온 줄기덤산, 진못 옆의 용어더미(용어등산)가 있다.

 

▲ 용어더미 
 

 

골짜기는 신천 본 마을 북쪽 진못 뒤에 있는 깐치밭골, 진못 북쪽 신천·남방·당리의 경계에 명매기(제빗과)가 많이 살았다고 한 명밋골 등이 있다.

 

▲ 깐치밭골 

 

논은 유곡동의 신제지(새못) 물을 받아 농사를 짓던 새못고래, 이수보 북쪽 한 그루의 큰 소나무가 있던 솔배기, 진못 밑에 있는 진못밑고래 등이 있다. 들판은 신천 서북 깐치밭골, 신천 남쪽 밭덤, 진못 밑의 진못밑들, 진못 안쪽의 진못안들 등이 있다.

 

▲ 진못과 진못안 깐치밭골

 

저수지

 

▲ 용어더미와 진못 전경 
 

 

신천동에는 조선시대 저수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경산 자인 간 도로변에 있는 진못이다. 이 저수지는 여지도서에서 니제(泥堤)로 등재된 후 지금까지 니제 또는 니지로 기록되고 있다. 주민들은 이 저수지를 질다고 하여 진못이라 부른다. 경산현읍지에는 이 저수지를 김연제(金淵堤)라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저수지 곁에 김씨가 살아서 김연제라 하였다고 하는데, 1911년 지적도에 진못 근처에 집은 보이지 않으므로 민간어원설로 보인다. 김연이 구개음화 현상에 의해서 으로 바뀌어 짐못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외 310·313·314·317·321 번지에 작은 저수지들이 일제시대 이후 축조되었는데, 현재 313·317 번지 저수지는 매립된 상태다.

 

▲ 경산시 도시농업공영농장과 진못 
 

 

그런데 지난 2021년 경산시는 진못 준설 공사 매립지 1,700평에 도시농업공영농장을 개장하여 경산에 살고 있으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 시민들이 텃밭을 가꾸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진못은 원래 넓이보다 상당히 줄어든 상태다.

 

기타 삶의 흔적

이외 신천동에는 1925년 구석기시대 돌도끼가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구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마을 입구 147번지에는 일제시대까지 당집도 있었는데,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 마을을 지나는 길은 과거 경산 자인 간 주요 도로이다 보니 비둘재[비들재]에 새말랭이주막, 붕디미에 붕디미주막, 남방에 앞방주막 등 주막이 무려 세 곳이나 있어 길가는 나그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다. 또한 마을 용어더미 옆 시냇가 205번지에는 수백 년 된 노거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지가 무성하였는데, 최근 가지치기를 하여 가지가 많이 없어졌다.

 

▲ 노거수 
 

 

이러한 마을에 1864년 대구에서 사형당한 동학 교주 최제우 선생의 시신이 붕디미주막(선돌배기)3일간 안치되면서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났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 유명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신천동 이야기는 바로 이 얘기로 시작해 볼까 한다.

 

동학 교주 최제우의 시신이 머물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진못과 붕디미주막

 

▲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진못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60년 서구 문명으로 대표되는 서학에 항거하여 동학을 창시했다. 창시와 동시에 전국에서 신도들이 늘어나자 성리학을 숭상하는 전국의 유생과 조선왕조는 삿된 도로 정도(성리학)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대구 경상감영 관덕정에서 그를 참수했다. 그러나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1890년대 이르면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신원운동이 일어났다.

 

▲ 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출처:近代日支鮮關係の硏究,1930)

 


이 최제우 선생에 대한 복권 운동이 1892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동학 1대 교주 수운 최제우 선생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이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라도 전주 삼례 봉기설은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로 일어난 것이며, 교조신원운동의 최초 봉기는 아니었다. 그러면 동학농민운동에 불씨를 당긴 교조신원운동은 어디에서 처음 일어났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운동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 최제우 선생이 대구에서 참형당한 후 그 시신을 운구하는 과정부터 알아야 한다.

 

▲ 붕디미주막터 

 

▲ 붕디미주막터 
 

 

18644월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당한 최제우 선생의 시신은 3일간 효수된 뒤 맏아들 최세정에게 전달되었다. 최세정은 동학교도 김경필·김경숙·정용서·곽덕원·임익서·전덕원 등과 함께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여 수레에 싣고 경주로 향하였다. 대구에서 경산을 거쳐 자인현 비둘재를 넘어 붕디미마을에 있는 붕디미주막에 이르자, 주막집 주인이 의분에 북받쳐 영구를 멈추라고 간청하기에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현재 신천·점촌·평산1동의 접경지고, 당시는 자인현 서면 남방동에 속한 작은 각단 붕디미였다.

 

▲ 붕디미주막터에서 바라본 진못 

 

그런데 최제우 선생의 시신이 도착하자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났다. 마을 북쪽에 있던 진못에서 갑자기 쌍무지개가 떠오르고, 오색구름이 주막집을 에워쌌다. 그때 최제우 선생의 시신은 약간의 온기가 돌았고, 목에는 칼에 베인 흔적이 사라졌다. 게다가 붉은 선이 고리처럼 에워싸고 기이한 향기가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마치 다시 살아날 듯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바닥에 엎드려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이런 현상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사흘 뒤에야 진못 위의 무지개와 집 위의 구름이 사라지면서 선생의 얼굴도 금방 검게 변하였다. 이에 다시 염습하여 경주로 향해 길을 떠났다,(박형채, 시천교종역사(1915)참고)

 

이러한 동학 교주 최제우 선생과 관련한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난 곳이 바로 신천동의 붕디미주막과 진못이다. 그런데 지금 붕디미주막은 훼철되어 밭이 되었고, 진못의 낚시꾼들은 무심하게 세월을 낚고 있을 뿐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인 교조신원운동의 발상지 자인현

 

동학 교주 최제우 선생의 신비스러운 자연 현상이 발현된 자인현은 바로 동학농민혁명(법률용어임)의 발상지였다. 현재 이 혁명의 시작은 전라도 고부라고 한다. 그러나 그 도화선이 된 교조신원운동의 발상지는 경상도 자인현이었다. 청나라 말기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인 야오시광(姚錫光, 18571921)1894년 쓴 동방병사략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동방병사략기 
 

 

광서 20(1894, 조선 고종 31) 4, 동학당이 난을 일으켰다. 동학이란 최복성이 창시하였는데, 유가·불가·도가의 여러 학설을 골라 뽑아 서로 전하여 널리 퍼져 나갔다. 경상도의 자인현에서 일어나 충청도·전라도 등지로 만연하였다. 동학교도의 움직임은 광서 19(1893) 421일 원세개에 의하여 리홍장에게 상세히 보고되었다(복성은 제우의 초명인 복술의 잘못이다.)”

 

위 내용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 이미 자인현에서 동학난이 발생하여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로 퍼졌고, 그러한 상황을 1893년 위안스카이가 본국의 리홍장에게 상세하게 보도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일컫는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고부, 교조신원운동은 전주 삼례역에서 일어났다고 알려졌지만, 그것의 도화선이 된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은 자인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현재 사학계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고,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바로 정형화된 지식의 결과이다.

 

▲ 자인면 읍내 전경 
 

 

그러면, 왜 하필 자인현에서 교조신원운동이 발생하였는가? 당시 경상도는 동학을 믿는 농민들로 가득 찼다. 그 이유는 바로 조선왕조의 가혹한 조세와 탄압 때문이었고, 그러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동학이 주장한 내용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당시 자인현민들도 동학을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특히, 앞서 언급한 최제우 선생과 관련한 자연의 신이한 현상이 생긴 곳이 바로 자인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이곳을 찾고 동학의 성지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이 신이한 자연 현상이 발현한 자인에서 교조신원운동이 먼저 일어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증명하는 것이 전라도 고부 봉기가 일어나기 10개월 전인 18934월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본국 리홍장에게 보낸 보고서이고, 또 그것을 1894년 야오시광이 쓴 동방병사략기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스운 사실은 당시 조선왕조가 동학혁명을 으로 규정하고 전국 각지에서 이를 진압할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의병장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도망가 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제104(18691872) 자인현감을 역임한 류도석은 현감직을 그만두고 고향 상주에 있었는데, 동학당이 난을 일으켜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받았다. 그런데 다음 날 그는 집안에 개인적인 일이 있다며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김석중, 토비대략(1894.12.9.)) 이 내용을 기록한 김석중은 안동 지역 동학교도들을 가혹하게 진압한 공로로 박영효의 추천으로 안동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896년 안동 사람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고 한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이 기존의 지식 체계와 상충하여 황당한 소설 같은 이야기라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 믿음의 객관적 자료인 중국 측 사료가 있으니 사회학이든, 과학이든, 종교학이든 개인적 믿음의 근거에 따라 판단하기 바란다.

 

우리는 가끔 정형화된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모든 사건은 단순하게 정형화되어 발생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이 정형화하기를 선호하고 그것을 기억하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정형화된 내용을 한 발짝 물러나 다시 보고, 다른 시각에 바라보면 정형화된 사실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정 편향 현상은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하는 태도이다.

 

경산 사람이나 경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동학운동의 발상지에 대해 한 번쯤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려는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동학 교주 수운 최재우 선생의 시신이 머문 주막은 복숭아밭이 되었지만, 쌍무지개가 뜨고, 오색구름이 발현한 진못은 그대로 있으니, 진못 옆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진못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리고 복사꽃 피는 봄날 붕디미주막 터도 방문해 보기 바란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정명환 작가

 

<사진 자료>

 

▲ 신천동 표지석 
 
▲ 진못 전경 
 
▲ 신천교회 전경 
 
▲ 도시농업공영농장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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