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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난다는 소문으로 마을 이름까지 바뀐 원효의 집 여천동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동지역 편(10) - 여천동

기사입력 2024-06-08 오전 10:31:42

 

▲ 여천동 전경 

 

▲ 여천동 전경 

 

▲ 여천동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여천동은 조선 초까지 경주부 자인현 서면 대사동(大寺洞) 유등천리(柳等川里)였다.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자인현 서면 서초동 유등천리가 되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유등천리는 여천동이 되었다. 이러한 행정 체제는 1914년까지 이어지다가 일제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그해 3월 압량면에 편입되어 경산군 압량면 여천동이 되었다. 해방 후 1987년 경산읍에 편입되었고, 1989년 경산시 여천동이 되었다. 현재 경산시 동부동에서 관할하고 있는 법정동이다.

 

대사동

자인현 행정구역 중 잊어버린 마을이 있는데, 바로 대사동(大寺洞)이다. 대사동은 글자 그대로 큰 절이 있는 마을이었다. 그 절은 바로 원효가 창건한 초개사이다. 초개사는 이 지역 출신인 고려 국사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그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그 후 고려시대 금당사, 조선시대 신림사를 거쳐 19세기 중엽 폐사되었다(삼국유사, 자인현읍지). 현재 이 초개사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역사·지리·문화적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개사는 유곡동 유음곡이라는 골짜기 현성산 아래에 있었다(자인현읍지). 한편, 하양현읍지에도 무락산(현 무학산)에 신림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자인현의 신림사와 동명이사(同名異寺).

 

초개사가 있던 마을이라서 대사동이라 명명된 마을에는 대사리, 유등천리, 유동리 세 촌락이 있었다. 이후 마을의 규모가 확장되고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대사리는 자인현 하남면에 편입되어 상대사리와 하대사리로 나뉘었고, 유등천리와 유동리는 자인현 서면 서초동에 편입되었다. 그 후 유동리는 유음곡리로 바뀌었고, 여기에 유곡 북쪽 내곡리(현 내동)가 생겨나 서초동에 편입되다가 서이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리고 상대사리와 하대사리는 이후 상대리와 하대리로 바뀌어 대사동의 흔적은 사라졌다(호구총수(1789)). 게다가 조선 후기 신림사가 폐사되면서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묻혔다. 한편, 경산현 서상동에도 옛날 대사리(大寺里)라는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이 마을은 백정들이 살던 촌락으로 자인현의 대사동과는 다르다.

 

유등천리·유천리

유등천리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마을이다. 8세기 경덕왕 때 전국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기 전까지 버들내라 불렀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는데, 그것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버들내를 향찰로 버들에 해당하는 ()’, ‘에 해당하는 ()’, ‘에 해당하는 ()’을 사용하여 유등천이라 기록하였다. 기록은 이렇게 한자로 하였지만, 부르기는 그냥 버들내라고 불렀다. 이 버들내를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불등을촌이라 하였다. 이 표기는 삼국유사한 곳에서만 확인되는데, 일연이 개인적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여타 자료에는 향찰식 표기 방식인 유등천리로 일관되게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버들내=유등천=불등을의 등식이 성립한다.

 

▲ 1912년 지적도 
 

 

이 유등천리는 19세기 중반 새 이름 여천(麗川)으로 부르면서, 유천(柳川)과 혼용되었다. 유등천리가 여천과 유천으로 혼용된 사례는 자인총쇄록(1888)에서 확인된다. 당시 읍지에는 모두 유등천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감이었던 오횡묵이 이 마을을 순시하고 적은 일기에 유등천리는 없고 여천, 유천, 그리고 유곡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중심 마을이었던 여천·유천은 49, 유곡은 묶어서 31호가 산다고 하였다. 이 가구 수는 1911년 토지조사사업 지적도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오횡묵이 순시하기 직전인 19세기 중반 유등천리는 여천과 유천 등으로 불렀다.

 

금이 난다는 소문으로 마을 이름까지 바뀐 여천리

 

▲ 금을 캤다는 거문골 일대 


 

그러면 유등천·유천이 왜 여천으로 바뀌었을까? ‘유등천에서 유천으로의 변화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유천이 여천이 된 것은 의아하다. 그 이유는 바로 200년 전 이 마을에 있었던 해프닝 때문이다. 1828년 갑자기 이곳에 금이 난다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경상감영에서 광산을 열겠다고 겁박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그래도 계속 겁박하자 하는 수 없이 허락하였는데, 외지 광산업자들이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논과 산소, 집안 등을 파헤쳐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런데 금은 조금 밖에 없고 돈만 낭비하고 떠나가 버렸다. 이때부터 이곳은 금이 난다는 소문으로 천자문 금생여수(金生麗水)여수에서 ()’를 따고, ‘()’는 마을 이름이었던 ()’을 그대로 사용하여 여천이라 부른 것이 1895년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이를 오횡묵은 유천의 어봉제 속에서 여수(麗水)가 난다는 말은 알겠지만, 하늘이 숨기고 땅이 아낀 보배()를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라면서 비판하였다(자인총쇄록). 금을 다른 말로 여수(麗水)라고 한다. 실제로 지금도 마을에는 금을 캤다는 거문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 여천동 지명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산과 골 및 들판

 

▲ 어봉골 전경 

 

여천동은 과거 오지여서 고개, 골짜기 등이 많았다. 대표적인 고개로는 자부랑골 동쪽 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다목곡 고개, 남천 송백리로 넘어가는 고리실 고개, 남산면 상대리로 넘어가는 상대곡과 송고개 등이다.

 

▲ 남산봉(왼쪽)과 상대곡(오른쪽)
 

 

골짜기는 금을 캤다고 하여 붙여진 거문골, 자부랑골 동쪽의 다막골, 어봉지에 있는 어봉골, 어봉골 동쪽의 밀양곡, 남쪽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골, 삼밭이 있어서 삼밭골, 어봉골 동쪽 승방이 있어서 신당골, 신당골 북쪽 샘바대 등 여러 이름이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저수지

여천동 저수지는 유등제(어봉지), 자부랑제(자불지다목지), 용제(밀양지), 여유지, 이천지(배남골못) 등 큰 저수지와 신당골못, 산밭골못, 새못, 무명지 1개 등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유등제, 자부랑제, 용제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도 등재되어 있어 적어도 조선 초기 이전에 축조된 저수지다.

 

▲ 어봉지(유등제)
 

 

유등제는 원래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못으로 불렀다. 16세기경 유등천리의 남산 옆에 있다고 하여 남산제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다시 유등천남산제가 되었다가 19세기부터 어봉제로 부르고 있다. 어봉제로 부른 이유는 이 저수지에 비친 산봉우리의 모습이 마치 봉황의 자태와 같고, 저수지의 물고기가 그 봉황과 노니는 모습 같아서 물고기 어봉황 봉을 써서 어봉제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어봉지라 한다.

 

▲ 자불지가 있던 일대 전경(화장품특화단지) 
 

 

자불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제제(普濟堤)로 등재되었다가 여지도서에 자화랑제(者火郞堤)로 바뀌었는데, 순우리말로 자불못으로 발음한다. 이 또한 15세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저수지가 있는 골짜기에 보제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그것이 자불암으로 바뀌어서 저수지 이름도 그에 따라 바뀌었다. 이 자불지 북동쪽 나무가 많아서 다목골이라 부르던 골짜기에 다목지라 부르던 조그마한 저수지도 있었다. 둘 다 현재 화장품단지 조성으로 매립되었다.

 

▲ 밀양지(용제)와 용지골 일대 
 

 

용제(龍堤)는 원래 용[미리]이 있었다고 그렇게 불렀는데, 마을에서는 조선시대까지 미리못이라 부르고 한자로 용제로 등재되었다. 그 후 미리가 한자로 다시 표기되는 과정에서 발음의 유사성에 따라 빽빽할 밀버드나무 양을 써서 밀양지가 되었다. 원래 용지라는 증거로 용지골이라는 골짜기와 여의주 모양을 한 여의주벼랑 등이 남아 있다.

 

▲ 여유지 

 

▲ 이천지 

 

▲ 배나무골 일대 
 

 

이외 80번지와 573번지에도 저수지가 조선 후기 축조되어 일제시대까지 있었는데, 현재 80번지 저수지는 매립된 상태고, 573번지 저수지는 새못이라 한다. 또한 여천과 유곡에 걸쳐 있다고 하여 명명된 여유지, 배나무가 많아 배남골로 부르던 골짜기에 축조한 이천지[배남골못], 신당골에 축조한 신당골못, 산밭골에 축조한 산밭골못 등은 모두 일제시대 이후 축조되었다.

 

화장품특화단지로 파헤쳐진 여천동

 

▲ 화장품특화단지 
 

 

현재 여천동 동쪽은 화장품특화단지 조성으로 기존 산과 골짜기 등이 완전히 파헤쳐졌다. 과거 이 마을은 남방리에서 한참을 가야 하는 오지였다. 그런데, 2010년 경산 백천동에서 사동과 점촌동을 거쳐 하대리까지 왕복 6차선 삼성현로가 개통되면서 접근이 쉬워졌다. 이 도로 개통과 함께 마을 동쪽 자부랑골 일대가 경상북도개발공사와 경산시가 화장품특화단지로 지정하여 개발하면서 온 산이 깎여 나가고, 골짜기는 메워져 수천 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기에 뜬금없이 화장품특화단지가 조성된 이유는 2016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K-뷰티 붐과 대구한의대학교 K-바이오헬스대학(한방화장품관련학과)의 영향이 컸다. 그러면서 중국의 한 회사가 투자하겠다고 하자 부지를 선정하고 분양에 나섰지만, 중국 업체가 갑자기 포기하는 바람에 현재 분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애꿎은 여천동의 산과 골짜기만 폐허처럼 남아 있다.

 

▲ 대구한의대 오성캠퍼스와 화장품산업단지 일대 
 

 

게다가 자부랑골 남쪽 골짜기는 2003년 아시아대학교가 이곳을 매입하여 대학을 설립하였다가 5년 만에 폐교되고, 건물과 부지는 대구한의대학교에서 인수하여 한방화장품 관련 학과 위주의 오성(五聖)캠퍼스가 되면서 더 파헤쳐졌다(오성은 지명이나 문화적 소재가 아니라 학교 측에서 임의로 정한 이름임).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란 명목으로 자연을 개발한 것이 결국 주민의 삶의 터전을 앗아버리는 역설적 현실이 되었다. 이를 통해 문화유적 보존과 산업 사이에 우리가 무엇을 중요시해야 하는지를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신라 불교의 거두 원효 성사의 마을

 

이러한 여천동이 천수백 년 전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계의 거두였던 원효 성사가 유년기를 보낸 집이 있던 마을이다. 과거 자인현이 원효 성사가 탄생하고 살던 집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최초의 자료는 고려 국사 일연이 쓴 삼국유사이다. 원효보다 400여 년 후대 사람인 일연은 원효가 태어난 곳과 원효가 살았던 마을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후대 사람들이 입맛대로 해석하는 바람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 원인은 태어난 곳과 살던 마을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불지촌이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해석하여 불지촌의 현재 지명인 여천동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불지촌이 현재 여천동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에서 원효가 태어난 것은 아니다. 또한 불등을촌불당곡이라 해석하여 자인 북사리 불당곡에서 원효가 태어났다고 한다. 원효가 태어난 곳은 자인 북사리가 분명하지만, 그곳은 일연이 말한 불등을촌은 아니다. 일연이 쓴 한문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어난 곳과 살았던 곳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원효가 태어난 곳은 불지촌 북쪽 율곡 사라수 아래(자인면 도천산 아래)’이며, 원효가 살았던 마을은 불지촌·발지촌·불등을촌(여천)’이다. 더 가관인 것은 원효가 태어난 율곡밤골로 해석하여 자인 주변 밤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곳은 모두 원효의 탄생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원효의 집 불지촌과 원효의 탄생지 북사리 

 

원효 성사의 집

일연은 원효 성사가 태어난 곳을 불지촌 북쪽 율곡의 사라수 밑이라고 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효의 어머니가 집에서 경주로 가다가 율곡에서 산기를 느껴 나무 밑에서 원효를 출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무를 나중에 사라수라 명명하고, 자신이 태어난 곳에 사라사라는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지금의 자인면 북사리 도천산 아래다. 그리고 일연은 불지촌의 위치를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 문장은 자인현이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지촌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다. , 불지촌은 처음 압량군에 속했다가 일연 당시 자인현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지촌은 현재 자인과 압량의 경계에 있어서 어떤 시기에는 압량, 어떤 시기에는 경산, 또 어떤 시기에는 자인에 속하는 등 이 세 지역이 교차하는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 불지·발지·불등을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으면 그곳이 바로 일연이 말하는 불지촌이고, 그곳이 바로 원효가 유년기를 보낸 마을이다.

 

여기서 핵심은 불등을촌인데, 이는 향찰식 표기다. 이를 순우리말로 읽으면 버들마을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자인과 압량 및 경산이 교차하는 지역에 버들이 들어간 이름으로 된 마을은 없다. 그런데 자인현읍지 등 기타 자료를 보면 19세기 말까지 자인현 서면에 유등천리(柳等川里)’라는 마을이 등재되어 있다. ‘유등천리또한 향찰식 표기인데, 이를 순우리말로 읽으면 불등을촌과 마찬가지로 버들내마을로 해석된다. 원래 유등천리였던 마을을 일연은 개인적으로 불등을촌이라 기록한 것이다. 일연이 버들류()’를 쓰지 않고, 부처를 의미하는 (, 과 통함)’을 쓴 것은 종교적 이유 때문으로 해석된다. 결국, 일연이 말한 불등을촌은 정식 명칭으로는 유등천리였다. 이 유등천리가 19세기 중반 유천또는 여천으로 불리다가 현재 여천동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언어학적 해석과 함께 이 지역에서 전하는 전설 또한 여천이 원효가 살았던 마을이었다고 전한다. 결국, 원효가 태어난 곳은 자인면 북사리 도천산 아래 어느 지점이며, 자란 곳은 경산시 여천동이다.

 

 

에필로그

 

글을 마치니 불현듯 멀쩡한 콩밭에서 금을 캔다고 온 밭을 파헤치는 인간의 욕망을 다룬 김유정의 소설 금 따는 콩밭이 생각한다. 수천 년 동안 아름다운 우리말 버들내또는 유등천리로 불러왔던 마을은 조선 후기 갑자기 금이 난다는 소문으로 온 마을이 파헤쳐졌다. 그런데 금은 나오지 않고 마을 이름만 금이 난다는 뜻의 여천으로 바뀌어 버렸다. 일제시대에는 이곳에 또 코발트가 난다고 하여 일본인들이 어봉골에 광산을 설립하고 지하까지 파헤쳤다. 이제는 이곳에 뜬금없이 화장품특화단지를 조성한다고 산과 골짜기를 파헤쳤다. 이래저래 여천동은 외지인들이 탐을 내는 금 따는 콩밭인가 보다. 진량공단 조성으로 사라진 대원리, 신제리, 광석리 등과는 달리 마을만은 없어지지 않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계의 거두였던 원효 성사가 살았던 이 마을에 지금이라도 원효와 관련한 기념물이나 공간을 만들었으면 한다. 산업 단지가 원주민을 먹여 살린다는 논리는 장밋빛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속칭 진량공단과 자인공단 등을 통하여 경험했다. 오히려 이러한 문화적 소재와 이를 알리는 콘텐츠가 지역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되었음을 정치인이나 행정 담당자들이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거 때마다 산업 단지나 무슨 특구 등을 조성하겠다며 홍보할 것이 아니라, 문화적 소재를 발굴하고 그것을 통하여 경산을 문화의 도시로 발전시키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원효 성사가 태어난 율곡은 자인면 북사리 편, 원효 성사가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절을 지었다는 초계사는 유곡동 편에서 다루겠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정명환 작가

 

<사진 자료>

▲ 상대리 회관 
 
▲ 어봉지 
 
▲ 여천리 경로회관
 
▲ 유곡지 
 
▲ 초개사 
 
▲ 초개사 
 
▲ 대구한의대 오성캠퍼스 
 
▲ 경산화장품특화단지 입구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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