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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대의 풍류가 서려 있는 미산1리(사미천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용성면 편(6)

기사입력 2024-04-16 오전 9:35:53

▲ 용성면 미산1리(사미천리) 전경 

 

▲ 미산1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미산1리는 조선시대 자인현 상동면 동삼동 사미천리(思美川里)였다. 줄여서 미천(美川)이라고도 하였다(자인총쇄록). 이 사미천리 안에 상사하사라는 작은 각단이 있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사미천리는 자인군 상동면 상사동과 하사동으로 분리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마을을 통폐합할 때 미천리(상사동·하사동)와 하동면 오산동이 합해져서 미산동이 되었다(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고시 40).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부군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경산군 용성면 미산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령 111). 해방 후 법정동은 미산동, 행정동은 미산1동이었다.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용성면 미산1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미산1리 지명지도 

 

 

사미천리는 마을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 다시 남서쪽으로 휘돌아 가는 시내 이름인 사미천에서 유래하였다. ‘사미(思美)’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민간 어원설인데, 이곳이 임진왜란 전 자인현 서면 지역이라서 서면에서 새민사미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당시 동면 지역이라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사미에서 음운변화를 일으켜 새민이라는 말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는 지형 어원설인데, 마을을 휘돌아 가는 시내의 토질이 고운 사질토라서 사질이 고운 시내라는 뜻으로 사미천(沙美川)’이 되었다는 설이다. 셋째는 언어적 어원설로, 우리 말 의 경상도 발음인 새미를 한자 사미로 기록하였다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유래는 두 번째다. 왜냐하면 시내 명칭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시냇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사미천리가 등재된 가장 오래 된 자료는 호구총수(1789)이다. 당시 자인현 상동면에는 원당리, 적제리(현 옥산1), 주야곡리(어일리), 쟁광리, 은곡리, 사미천리, 당리, 고죽리, 외가촌리(현 외촌리), 내가촌리(현 내촌리), 독곡리(현 매남리) 등이 속했다. 이 자료에는 사미천리의 아름다울 미아닐 미로 써서 사미천리(思未川里)로 등재해 놓았다. 기록은 이럴지라도 그 이전부터 마을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단지, 전하는 바로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경주김씨와 능성구씨가 차례로 들어오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 상사리와 고개밑 

 

▲ 하사리 

 

이 사미천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개의 각단으로 나누어졌는데, 북쪽에 있는 각단을 상사리 또는 웃각단, 동남쪽에 있는 각단을 하사리 또는 아랫각단이라 한다. 그리고 상사리에 속하지만 서남쪽 정상고개 아래에 있는 촌락을 따로 고개밑이라고도 한다. 상사리와 하사리는 모두 사미천의 위쪽과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 새알산과 정상고개 

 

▲ 정상고개 

 

▲ 귀부리산 

 

 

삶의 터전과 흔적

 

사미천리는 고죽리 남쪽 새알산(수양산)이라 부르는 산을 북서쪽에 두고, 고죽리에서 내려오는 천북천과 도덕리에서 내려오는 도덕천이 합수하여 생긴 사미천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서쪽으로 돌아 흐르는 지점과 송림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송림천과 만나는 물돌이 터에 위치하고 있다. 서북쪽 새알산에는 서북골이라 부르는 깊숙한 골짜기가 있고, 서남쪽에는 은곡리로 넘어가는 정상고개, 정상고개 아래 거북의 등을 닮은 귀부리산(일명 고비기)과 산 가장자리로 돌아가는 귀부리모팅이라는 골이 있다. 또 서남쪽 귀부리산 아래에는 귀산걸웅딩이라는 웅덩이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마을 동남쪽으로 밭이 있었다.

사미천리에는 청동기 시대 지석묘가 많았는데, 마을이 형성되면서 대부분 없어지고 상사리 해와재 서쪽과 학천재 주변 등에 4기가 남아있다. 또 이 마을은 경주김씨, 능성구씨, 파평윤씨가 주로 살고 있는데, 각 문중에서는 조상을 추향하는 재실을 지어 놓았다.

 

▲ 해와재 전경 

 

▲ 해와재 현판 

 

▲ 경주김씨세적비 

 

 

미산1리 경주김씨는 두계공 김충유를 파조로 하는데, 그의 증손 농재 김경철이 사미천리 입향조이다. 경주김씨 미천문중에서는 삼시재와 해와재를 지었다. 삼시재(三是齋)는 하사리에 있었는데, 경주김씨 두계공파 김현(金顯)을 추향하던 곳으로 기존 재실이 허물어지자 1917년 김진학, 김영수, 김병용 등 후손들이 뜻을 모아 중건하였다. 여기에 자인 읍척리의 최두현이 쓴 삼시재기가 있었다. 삼시재를 건립한 김진학은 자신의 집을 학천대(鶴川臺)라 칭하였다. 삼시재와 학천대는 지금 없다. 해와재(海窩齋)는 경주김씨 두계공파 해와 김붕(金鵬)을 추향하기 위해 1931년 지었다. 김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과 호 두 아들과 함께 권율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묘향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 후 정유재란 때 도총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행적은 선무원종공신록호성원종공신록에 기록되어 있다. 해와재 앞에는 1997년 문중에서 경주김씨세적비를 세워 놓았다. 최근 문중에서 해와재를 산뜻한 모습으로 중건했다.

 

▲ 학천재 전경 

 

▲ 운포선생능성구공추모비 

 

 

학천재(鶴川齋)는 능성구씨 학천 구성신(具誠信)1847년 사미천리 입구 구연대 근처에 학천정(鶴川亭)으로 건립하였다. 그 후 구성신의 현손(고손자) 운포 구희조(18841959)가 하사리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여 학천재라 이름 짓고 여러 선비와 함께 학문을 닦던 강학소로 이용하였다. ‘학천재운’, ‘서루원운’, 송창헌이 쓴 학천재기게판문이 있었는데, 현재 학천재 현판만 있다. 1971년 학천재 앞에 구희조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 유미재 


 

유미재(有美齋)는 상사리와 하사리 경계에 있는데, 파평윤씨의 재실이자 강학소였다. 겉모습은 여염집처럼 꾸며 놓고 현판은 없다.

1888년 사미천리는 상사리와 하사리를 합쳐 101호가 거주하고 있는 큰 마을이었고, 대표는 김석로(金錫魯)였다. 1912년에는 상사리 40여 가구, 하사리 80여 가구가 있었다. 이외 조선시대 상사리에 상사막, 하사리에 하사막이라는 주막이 있어 길 가는 나그네에게 휴식과 한 잔의 술을 제공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현재 가구 수는 약 206, 주민 수는 402명인데, 경주김씨, 능성구씨, 파평윤씨들이 많다. 근대 이후 국회의원, 금융인, 경찰, 행정가, 학자 등이 이 마을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주민은 사미천 앞 밭에 주로 감자와 복숭아 농사를 지었는데, 최근 포도 농사를 짓는 집도 늘어나고 있다.

 

▲ 미산숲 동네 도서관(출처 : 용성면생생정보)
 

 

마을이 용성면 소재지와 가깝다 보니 문구점, 한의원, 택배회사, 정미소, 주유소, 카센터, 요양원, 세차장, 노인복지센터, 카페 등이 들어와 있다. 특히, 마을에서는 소규모마을 디자인단을 구성하여 각종 문화 행사를 개최하여 살아 있는 마을로 탈바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산숲 동네 도서관을 개관하여 주민들에게 독서 공간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마을에 강가 절벽을 구연대라 이름 짓고 옛 자인현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고,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회화나무, 느티나무, 왕버들나무 등 수십 그루가 사미천을 휘감고 있어 가을 단풍이 들 무렵이면 장관을 이룬다.

 

▲ 구연대 전경 

 

▲ 구연대 글씨 

 

 

구연대에 서린 용성 선비의 풍류

 

자인에서 용성으로 들어가다가 은곡리와 미산1리 경계 지점이자 사미천과 송림천이 만나는 시냇가에 구연대(九淵臺)라 칭한 바위 절벽이 있다. 일제시대 용성 선비 윤현기, 강덕룡, 최한주, 김성호, 허영구, 이장우, 최한구, 배병렬, 김홍렬 등 9명이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매년 99일 이곳에 모여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시사 결성 날짜는 192599일이다. 이때 이들 9명은 구연대라는 글씨와 자신들의 이름 및 출생년을 절벽에 새겨 놓았다. 이 모임은 경산군지(1933)에 소개되어 있다.

 

구연대의 명칭은 이 시 모임의 구성원이 9명이고, 사미천의 깊은 물웅덩이가 연못처럼 되어 있어서 구연이라 하고, 그 절벽을 구연대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이 구연대에서 어떤 시를 짓고 어떻게 풍류를 즐겼는지에 대한 자료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구성원들이 쓴 작품이 옛 자인현 곳곳에 있어 그들의 몇몇 작품과 이력을 소개하면서 이 모임의 흔적을 알리고자 한다.

 

윤현기(1879년생)는 사미천 사람으로 1923년 관란서원의 현판을 썼다. 최한주(1882년생)와 최한구(1890년생)는 곡란 사람으로 1912년 용강서당 용강재에 유신학교라는 일종의 혁신학교를 설립하여 참나무에다 산누에를 치는 기술을 보급했다. 최한주는 1923년 관란서원 장임을 역임했으며, 최한구는 용성산업조합 감사로도 활동했다. 특히, 최한구는 곡란리 난포고택 종손이기도 하다. 그의 시 한 편이 용성의 삼락대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시는 경산군읍지(1933)에만 실려 있고,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구름 끝 숲 기슭에 저절로 절벽을 이루었으니

땅이 감춰둔 신령스런 곳에서 경치를 즐기네.

마침내 나그네에게 수계를 하게 하니

올라서서 굽어보며 때로 한가할 때 와보세.

 

김성호(1884년생)는 덕천 사람으로 자인현 상동면 면임으로 있다가 1914년 용성면이 생기면서 초대 용성면장을 역임하였고, 1921년 자인금융조합 감사, 1927년 용성산업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지은 한시 게판문 하나가 현재 자인 계정숲 시중당 방안에 걸려 있다.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정자 편액과 누각 이름이 황폐한 성을 지키며

인산(자인)으로 하여금 그믐에도 빛나게 하네.

동쪽 누각의 매화는 꿈에서도 생각나게 하고

서림의 늙은 계수나무는 새 정에 흡족해하네.

주렴으로 들어오는 빼어난 경치는 색을 더하고

현판의 아름다운 이름은 먼 후대 소리에 답하네.

옛날 선조는 먼저 수고하고 뒤에 근심했는데

유구한 선조에 대한 감회가 더더욱 생겨나네.

 

허영구(1895년생)는 고죽 사람으로 1924년 자인향교 장의로 있으면서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이장우(1885년생)는 덕천 사람으로 1927년 용성산업조합 감사를 역임하였다. 배병렬( 1890년생)은 자인 읍천(천마리·냇마) 사람으로 1920년 자인공립보통학교 훈도를 하다가 1923년 용성공립보통학교 훈도를 거쳐 1938년 용성면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60년 자인 천마리 달성배씨 재실인 학명재를 중건하였는데, 그의 시가 단북리 밀양박씨 재실인 모현재와 천마리 달성배씨 재실 학명재에 각 한 편이 걸려 있다. 학명재에 걸려 있는 한시 한 편만 소개한다.

 

맑은 물이 깊은 산에서 끊임없이 흐르니

조상님 재실을 이 가운데 다시 짓네.

구름과 안개가 깊이 잠기니 하늘이 응대하는 듯하고

꽃과 대나무가 한가하니 생각도 절로 한가하네.

책상에 서적이 쌓이니 조상님 옛 발자취 머무르고

집을 증축하여 시를 읊으니 문득 새로운 모습이네.

조심하여 어찌 감히 갱장의 그리움을 잊으리 마는

한 잔 술은 석양에 흔적을 남기며 갔다가 다시 돌아오네.

 

김홍렬(1895년생)은 경주김씨 미천문중 사람으로 1924년 자인향교 장의, 1937년 관란서원 유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한시 한 편이 신관리 보원재에 게판문으로 걸려 있다.

 

네 척의 묘지와 백 척의 누각

보원으로 편액하니 추모의 감정 여기 남았네.

진사도의 견씨를 위한 사정의 뜻은 꺾여 쇠하고

구양수의 농강천표의 말은 대강 짐작해 아노라.

언덕 가득한 가래나무 뽕나무는 두려움을 더 하고

가문의 한결같은 형제 모임은 온화함을 드러내네.

집 밖의 천 그루 오얏을 당연히 알겠으니

기운은 뿌리와 잎에서 발하여 곧바로 번성하리라.

 

 

▲ 미산숲 당나무 

 

▲ 미산숲 전경 
 

 

수백 년 된 노거수로 둘러싸인 사미천리

 

미산1리 북쪽 천북천과 도덕천이 만나는 흔히 미산숲이라 부르는 사미천 냇가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회화나무, 느티나무, 왕버들나무 등 40여 그루의 보호수와 노거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중 한 그루는 당나무라 하여 마을에서 신성시하고 있으며, 숲 전체가 경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1912년도 지적도(초록색- 대지, 파란색-숲, 노란색-사미천물길)
 

 

이 숲을 현재 미산숲으로 부르는데, 언제 조성하였는지 알 수 없다. 자인 현감 정충언(1763년 부임)이 고죽리에 있는 대흥사를 방문하여 쓴 종각이라는 시에 사미천가에는 개암나무와 씀바귀가 많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사미천가에는 각종 수풀로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 풍치목, 즉 멋스러움으로 조성했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사미천리의 동북쪽과 서남쪽이 훤히 트인 바람길이라서 방풍림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1912년 작성된 지적도를 보면 마을을 중심으로 도덕리 쪽 동북 방향과 고은리 쪽 서남 방향에 숲이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숲이 조성되지 않은 북서쪽은 새알산과 동쪽은 유덕산이 가로막혀 있고, 남쪽은 당리 마을이 있어 숲이 필요 없었다. 현재 미산1리 북동쪽 숲만 미산숲이라 하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마을 서남쪽 사미천 하구 쪽 양옆에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구연대 절벽이 있는 곳도 같이 미산숲의 연장선상에서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면 한다.

 

▲ 미산숲 어울봄 음악회(출처 : 용성면생생정보)


 

그 동안 이 숲은 그저 마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주는 나무 정도로만 여겼다. 최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2021년 용성면에서 휴식 공간으로 단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마을에서도 이 숲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2023년 마을디자인단 주최로 미산숲 어울봄 음악회를 여는 등 각종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단풍이 드는 가을이면 숲 전체가 노랗게 물들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오산리 맹구대와 관란대, 낙호대의 훼손을 거울로 삼아 경제적 이익과 편리함만을 생각하는 개발 논리 때문에 이 숲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

 

에필로그

 

구연대 구성원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시대 자인현 상동면(용성)의 마지막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배운 한학이 사회적으로 소용없는 시대에 살면서 조선의 정기를 풍류로 삭이면서 한적한 지방에서 살다 간 인물들이다. 이들을 마지막으로 옛 자인현 선비의 맥은 다했다 할 수 있고, 그들이 풍류를 읊던 구연대는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옛날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구연대라는 글씨는 가려져서 일반인들이 잘 볼 수 없다. 지금이라도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도롯가에 조그마한 안내판을 세워 유적지로 기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조상들이 물려준 미산숲을 잘 보존하여 미산리가 문화의 마을로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사미천리

 

사미천리에 와 보세요.

얼었던 금박산 봄물이 바람 타고

고죽골 서북골 지나 물돌이에 이르면

사미천 귀산걸웅딩이 구연대 어디쯤

옛 선비 풍류 가락으로 피어나지요.

 

사미천리에 와 보세요.

금곡리 거쳐온 망디기 바람이

고비기 정상고개 너머 관란천에 가다가

사미천 미산숲 왕버들 손잡으면

귀부리산 거북이 노랫소리로 안아 주지요.

 

귀부리산 구연대 미산숲 왕버들

이슬 같은 노랫소리

복사꽃 살구꽃 배꽃 벚꽃 되어

해와재 학천재 유미재 처마 봄비처럼 깔리는

사미천리에 와 보세요.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미산1리 마을 전경 
 
▲ 귀부리산 
 
▲ 구연대 
 
▲ 미산숲 
 
▲ 미산숲 동네도서관 
 
▲ 도서관 내부 모습
 
▲ 유미재 
 
▲ 해와재 
 
▲ 학천재 
 
▲ 경주김씨세적비
 
▲ 운포선생능성구공추모비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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