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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팔경 남매지의 전설을 품은 계양동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동지역 편(6) - 계양동
기사입력 2024-04-02 오전 9:01:32
▲ 계양동 전경(신 계양동 지역)

▲ 계양동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계양동(桂陽洞)은 조선시대 경산현 읍내면 동계리(洞溪里)와 청우동(靑牛洞)을 아우른 마을이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생활권이 다른 두 마을을 통합하여 경산군 동면 계양동으로 명명하였다(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고시 40호). 이때 계양의 ‘계’는 동계리의 ‘계’에서 땄지만, ‘양’은 청우동 지역의 특징을 딴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경산군 경산면 계양동이 되었다(조선총독부령 111호). 해방 후 이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1956년 경산면이 경산읍으로, 1989년 경산시로 승격되면서 현재 경산시 계양동이 되었다.
▲ 동계동 전경
- 동계리 유래
동계리는 『호구총수(1789)』부터 등재되어 있지만, 이미 15세기에 사람이 거주했다는 족보 자료가 있어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마을 이름은 마을에 있는 계수나무가 다른 마을과 경계를 이룬다고 하여 동계(洞桂)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한자를 바탕으로 역 추정한 유래이다.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재된 『호구총수』나 이후 19세기까지 자료에는 일관되게 ‘시내 계’를 써서 동계(洞溪)로 기록되어 있다. 동계동은 북으로는 임당들판이 자리하고, 남동쪽으로 삼풍동의 산골짜기에 조성된 마을이라서 일명 ‘곡계(谷溪)’라고도 하였다. 한자 ‘동(洞)’과 ‘곡(谷)’은 상통하기 때문에 곡계와 동계는 같은 곳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바뀌면서 동계동의 ‘시내 계’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계수나무 계’로 바뀌었고, 그것이 『조선지지자료』에 그대로 동계(洞桂)라 기록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산현지(1871)』에는 동구리(東龜里)라 기록되어 있다. 이외 발음하는 과정에서 ‘딩기·덩계’ 등으로도 불렀다. 현재 동계동의 법정동은 계양동이지만, 행정동은 북부동이다.
▲ 청우동 전경
- 청우동 유래
청우동(靑牛洞)은 『경산현지(1786)』부터 등재되어 청어(靑魚), 청하(靑霞) 등 여러 이름으로 전하고 있지만, 원 마을 이름은 청우(靑牛)이다. 이 ‘청우’가 발음하는 과정에서 ‘청어’나 ‘청하’ 등으로 변이되었다. 그래서 변이된 이름에서 마을 유래가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청우’를 ‘청어’라 발음하다 보니, 발음의 유사성에 의해 이 마을에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청어’가 한 마리씩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는 데서 청어동이라 명명했다는 전설이 대표적이다. 또 ‘청하’로 발음되다 보니 이른 아침에 새파란 안개가 낀 데서 ‘청하’가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 호사가들에 의해 윤색된 유래일 뿐이다. 『경산현지(1786)』, 『호구총수(1789)』, 『경산현읍지(1832)』, 『경산현지(1871)』, 『조선지지자료(1911)』, 『지적도(1912)』 등에는 일관되게 청우동(靑牛洞) 또는 청우리(靑牛里)라 기록하고 있다. 『자인총쇄록』에는 ‘청하’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청우동의 남쪽 골짜기 안(현, 상방동)은 처음 우동(牛洞)이라 하다가 나중에 우곡(牛谷, 쇳골)이라 하였다. ‘동(洞)’과 ‘곡(谷)’은 모두 골짜기를 뜻하는데, 마을 단위를 나타내는 ‘동(洞)’과 구분하기 위하여 ‘곡’으로 바꾸었다. 이 우곡이라는 골짜기에 우곡제[牛谷堤, 소우곡지]라는 저수지가 지금도 있다. 결국 ‘우곡’이나 ‘우곡지’는 모두 청우동과 연결되어 ‘소’에 관한 전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계양동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동계동 지역
▲ 동계동 지역

▲ 1911년 동계동 지적도
동계동은 일명 ‘덩계·딩기’ 등으로 불렀는데, 모두 사투리 발음이다. 이 마을은 과거 주거 단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서쪽 들판에 경산임당호반베르디움이라는 아파트단지와 상가가 들어서 있다. 이 딩기 북쪽 40∼50번지 일대에도 약 6가구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북경찰청 제1기동대와 상가 등이 들어서 있다. 동계의 중심 마을 딩기와 북쪽 각단 사이 84번지에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었는데 도로 개설로 매립되었다. 331번지에도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었다. 이 딩기 남쪽에 과거 경산군 교육구청이 있어 ‘구청말’이라 부르는 각단도 있었다.
▲ 영남대학교 기숙사
남매지와 삼천지 사이 동계동 남쪽 산에는 현재 영남대학교 기숙사가 있다. 마을 들판이었던 곳은 현재 완전히 아파트 숲으로 변하여 상전벽해를 느끼게 한다.
- 청우동 지역
▲ 청우동 지역

▲ 1911년 청우동 지적도
▲ 슁잇골에 있는 경산경찰서와 경산시민운동장
청우동은 현재 사라졌고, 이곳에 경산경찰서, 경북교육청정보센터, 남매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과거 ‘슁잇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현재 경산경찰서에서 옛날 경산현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골짜기에 경산현의 여제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이 골짜기 안쪽 상방동 가는 곳에 현재 경산시민운동장과 경산실내체육관이 있다.
▲ 오누부못안에 있는 경산시보건소와 남매공원
▲ 경산중고등학교
그리고 청우동에 있는 남매지는 오누이가 만들었다고 하여 일명 ‘오누부못’이라고도 한다. 남매지 서쪽에도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이 각단을 ‘오누부못안’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폐촌되어 경산시보건소와 남매공원이 들어섰다. 또한 남매지 동쪽 일부를 매립한 곳에는 현재 경산중·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과거 논밭이었던 청우동 남쪽 자인가는 쪽에는 계양주공아파트 등 대규모 주거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외 이곳에는 경산시민회관, 경산정수장, 동부초등학교 등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초원전원2차아파트가 들어선 계양동 600번지에는 장산제(章山堤)라는 오래된 저수지가 있었는데, 개발로 매립된 상태다. 이러한 마을 동계동에는 임진왜란 의병장이 살았고, 청우동에는 남매의 애틋한 사연과 일제시대 경북 팔경에 입선될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운 남매지가 있다.
◆ 임란 의병장 정변문 선생이 살던 동계동
동계동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경산을 방어한 의병장 방주 정변문(鄭變文) 선생이 살던 곳이다. 그는 원래 남쪽 상방동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거했다. 그의 5대조는 고려 말 경산에 유배되어 상방동에 살던 양헌 정인(한자음은 ‘연’인데, 문중에서는 ‘인’이라 발음함)이고, 고조부는 정이온, 증조부는 정영번, 조부는 정예손, 부친은 정황이다. 의병장 상천 정변함, 동암 정변호와는 사촌지간이다. 임란 당시 정변함은 백천동, 정변호는 옥곡동, 정변문은 동계동에 살았다. 그래서 이 세 분의 후손들은 각각 천동 소문중, 옥곡 소문중, 동계 소문중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형제는 안심 반계동(현 율하동)의 최응담, 상방동에 살던 진섬·진엽, 하양 율촌의 남중옥, 고산 내매동(현 신매동)의 박응성·박응량, 경기도 파주에 살다가 경산현 군관으로 왔던 승적 등과 의병을 일으켜 남천 금성산성, 고산 망월산성 등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후 망우당 곽재우가 진을 치고 있던 화왕산에 들어가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용사세강록』에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끝나자 삼 형제는 향리에서 학문에 힘쓰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1948년 후손들이 삼 형제의 의거를 추모하기 위하여 옥곡동에 삼의정을 창건하였다.
*의병장 : 의병이라 하지 않고 의병장이라 함은 이들이 혼자 창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마을의 장정 및 가솔(노비)을 함께 거느린 소규모 군사 조직의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 남매의 애틋한 사연을 품은 경북팔경 남매지
▲ 남매지 전경
- 남매지의 역사
청우동에 오래전부터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현재 남매지(男妹池)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이 저수지는 원래 사제(乍堤)라 불렀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관개 120결(먹)’이라 하였을 정도로 큰 저수지였고, 유서도 깊다. 사제는 15세기 중방리에 속했다. 임진왜란 후 이곳에 마을이 생기면서 청우동이라 불렀는데, 저수지는 그대로 사제라 불렀다. 그러다가 『여지도서(1765)』에서는 ‘사제제일남제’와 ‘사제제이매제’로 구분되어 있다. 15∼18세기 사이 사제 북쪽 동계리 쪽에 저수지가 새로 축조되면서 원래 사제는 ‘사제제일남제’라 부르고, 북쪽 새로 생긴 저수지는 ‘사제제이매제’라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매가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생긴 듯하다. 또한 『경산현읍지(1832)』에는 ‘사제제일남제’와 ‘사제매제’로 구분되어 있다. 그 후 이 두 개의 저수지는 줄곧 ‘남제’와 ‘매제’로 구분하여 불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되어 『조선지지자료(1911)』에 ‘남매제’로 등재되어 있다. 1911년 지적도를 보면 이미 당시에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911년 남매지 지적도

▲ 1926년 남매지 확장 공사 지적도
그런데 1926년 조선흥업주식회사가 남매지 확장 공사를 하면서 남매지 둑 아래에 새로 못둑을 축조하여 기존 남매지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사진은 『조선흥업 30년사』에 실린 1926년 10월 남매지 모습으로, 기존 남매지의 둑은 가느다랗게 흔적만 남아 있다. 이 둑을 기준으로 아래쪽이 기존 남매제이고, 위쪽이 일제시대 새로 축조된 부분이다. 현재 분수대를 기준으로 남쪽이 기존 남매제, 북쪽이 확장된 부분으로 보면 된다. 그 후 1910년대 청우동 남제 남쪽에 경산 자인 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다리가 놓였다. 1999년 이곳에 경산경찰서가 들어서면서 다리 남쪽 남제 일부가 매립되고, 나머지를 남매지라 부르고 있다.

▲ 1926년 남매지 사진(지금까지 공개된 사진 중 제일 오래된 사진)
- 일제시대 경북팔경에 속했던 남매지와 현재의 남매지
이 남매지는 일제시대 경산면을 대표하는 저수지였다. 일제 초기에는 조선흥업회사가 관리하다가 이후 경산수리조합이 관리하였다. 1926년 10월 공사비 7만 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확장 공사를 하였다. 관개 면적 325정보, 만수 면적 30정보(9만 평), ‘경북팔경’에 꼽힐 정도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였다(『조선흥업30년사』). 1997년 이 남매지 준설 공사를 하면서 청동기 시대 석관묘 1기가 발견되었다. 현재는 경산시청 바로 옆에 있는 저수지라서 시청에서 특별히 공을 들여 시민의 휴식처와 산책로 및 분수대를 만들어 아름다운 저수지로 거듭나고 있다.
- 남매지에 전하는 애틋한 전설
남매지 전설은 3종류가 전한다. 첫째는 남매지 조성과 관련한 설명적 전설, 둘째는 남매지 이름과 관련한 오뉘 힘내기 전설, 셋째는 금기에 관한 신앙적 전설이다. 이 세 설화는 모두 남매지라는 이름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 생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것이든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다. 남매지 연기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남매가 살았는데, 위의 못은 오라버니가 막았고, 아래 못은 여동생이 막았는데 남매는 일종의 못 싸움을 하였다. 위의 못 둑을 터지게 하여 아래 못의 못 둑이 터지면 누이동생이 지고, 안 터지면 오라버니가 졌다고 한다. 그래서 위의 못을 남제라 부르고, 아래 못을 매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설화는 관탈민녀형 설화의 변이형이다. 가난한 집안에 홀어미와 남매가 살았는데, 아들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과거를 보기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한양까지 올라갈 여비가 없었다. 그래서 누이동생은 같은 마을 황부자한테 찾아가 종살이를 자청하고 돈을 빌려 오라버니에게 주었다. 그 돈으로 한양까지 간 오라버니는 장원급제하였다. 그런데, 황부자집에서 종살이하던 여동생이 그 집 아들에게 겁탈당했고, 정절을 잃은 여동생은 못에 빠져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홀어미도 딸을 찾으러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귀향한 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황부자의 횡포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빠져 죽은 저수지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 못을 남매가 빠져 죽은 못이라 하여 남매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금기형 설화는 이 못 부근에 오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이 못에 살던 커다란 가물치를 잡아서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고는 마을 전체가 모두 죽었다고 하는 설화이다.(이상 경산문화원, 『경산의 전설과 민담』 참고)
◆ 에필로그
경산시는 저수지의 고장이라 할 정도로 옛날부터 저수지가 많았다.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 항목을 따로 다룰 정도로 옛날부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경작지를 조사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고, 정부에서는 세금 징수의 자료로 썼다. 그래서 읍지에는 빠짐없이 저수지 항목을 정해 놓고, 몽리 면적이나 저수지의 깊이와 둘레를 기록해 놓았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저수지의 활용도가 낮아지고, 그에 따라 저수지에 대한 중요성도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최근 주거단지나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아무 생각 없이 저수지를 매립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수지 축조 사연이나 거기에 얽힌 이야기도 함께 사라져 우리의 정신문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자인단오제 역사의 뿌리를 증명하던 버들못이 자인공단 조성으로 매립되었고, 성사 원효가 살던 여천동에 화장품단지가 조성되면서 원효와 설총이 거닐었을 자부랑지가 매립되었다. 다행인 것은 지난 2000년 경산시에서 『경산의 호소』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각 저수지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구전이나 현장 조사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오류가 많다. 이제라도 경산 지역 저수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 정명환 작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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