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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중국 종단 여행기를 쓴 최두찬이 살다 간 자인 원당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자인면 원당리

기사입력 2024-02-29 오후 4:47:25

자인면 원당리 전경


 

역사와 유래

 

이 마을은 조선시대 자인현 상동면 동초동 원당리였다. 동초동에는 원당리 하나만 속해 있었는데, 1830년대 이후 선창리(현 계남2)가 새 행정단위로 승격되면서 상동면 동초동에는 2개의 마을이 있었다. 그러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 관보394호에 의해 상동면에서 떨어져 나와 읍내면에 편입되면서 읍내면 원당동이 되었다. 이후 1988년 동 이름 개편에 따라 원당리로 다시 바뀌었다.

원당리는 원님이 있는 마을이라서 원() 대신에 원()을 쓰고, 한장군 사당이 있어 당()을 붙여 원당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경주이씨양월문중고문서1584년 자인현민들이 경주부의 속현에서 벗어나고자 남면 원당에서 상소를 내자고 합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1667년 이곳에 현청이 들어서기 전인 1584년에도 원당이라 불렀으므로 현청과 관련한 마을 이름 유래는 후대에 윤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에는 상동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인현 남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마을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동쪽 윗동네, 서쪽 아랫동네라는 2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는 약간 떨어져 있어 구분되었지만, 지금은 맞붙어 있어 구분하기 어렵다.

 

원당리 산과 들판


 

삶의 터전과 흔적

 

원당은 자인면 행정구역상 제일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동맷등이라는 작은 등성이가 있고, 동쪽에는 속칭 범아구리라 부르는 나지막한 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매정산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쪽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고, 벌판 너머 자인의 젖줄인 오목천이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형의 지형에 마을이 위치하여 옛날부터 길지라 여겼다. 산과 골이 깊지 않다 보니 그에 관한 이름은 별로 없고, 들판이 넓어 들판 관련 이름이 많다.

 

원당리 지명 지도
 


산은 마을 동쪽 동산이라 부르는 작은 산이 있다. 이곳에는 범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범밧모팅이에 범바우와 범아구리가 있다. 그리고 동쪽 끝에는 지형이 노루를 닮아서 놀구비알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마을 서쪽에는 매정산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마을 앞 논은 동쪽에서부터 지대가 높아 용두레인 파래로 물을 퍼 올려 농사를 지었다는 파래매기, 경주이씨가 과거에 급제하여 세운 솟대가 있었다는 화짓대거리, 띠가 많아서 띠발말리(띠밧매이), 원당보 남쪽에 지형이 섬처럼 생겼다 하는 섬배미, 장승배기 서쪽 옛 집터가 있었다는 웃텃골, 서쪽에는 옥터가 있었다는 옥거래 등의 논이 있었다. 들판은 마을 앞에 감남보의 물을 대고 감나무가 많았다는 감남들, 감남보 서쪽에 장승이 서 있었다는 장승배기, 서쪽의 원당들, 서북쪽 기리지 근처에 탑이 있었다는 탑만리, 북쪽에 황씨와 정씨가 살았다는 황정골이라는 들판이 있었다. 이처럼 논과 들에 많은 이름이 있었으나 경지정리로 옛 이름이 거의 사라져 버렸고, 현재는 그냥 원당들, 앞들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다. 저수지는 마을 서북쪽 매정산 뒤편에 기리지가 있는데, 마을과는 상관없이 서부리와 계남리의 들판에 물을 대던 곳이다.

 

용계서원 충현사 전경

 

삶의 흔적으로는 영천최씨 원당문중의 인지재와 용계서원 충현사가 있고, 자인의 한장군과 누이를 배향하는 사당인 진충묘가 있다. 또 자인현의 읍치가 있을 당시 세운 현감 공덕비가 3개 있다. 인지재는 원래 인지정사라 불렀는데, 영천최씨 문중의 의병장 최문병이 1579년 울곡리에 살 때 세웠다가 나중에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초기에는 영천최씨 문중의 강학소로 이용되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영천최씨 문중의 재실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계서원 충현사는 의병장 최문병을 배향하기 위하여 자인현 9개 고을에서 성금을 갹출하여 1700년 창의사로 건립하였다가 1712년 충현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1786년 용계서원으로 승격했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철되었다. 그러다가 1978년 충현사를 복원하여 현재는 용계서원 충현사라 부르고 있다

 

진충묘

 

그리고 마을 서쪽 매정산 끝 부문에는 한장군과 누이를 배향하는 진충묘가 있다. 자인이 현이었을 당시 각 면에 한장군 사당을 하나씩 건립하여 자인의 수호신인 한장군과 누이를 배향하였는데, 이곳 원당리가 자인현청이 있던 곳이고, 또 상동면의 면두(현 면장)가 살던 곳이라서 한장군 사당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원당리 주민들이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현감 공덕비


 

또한, 이 마을 서쪽 입구 매정산 끝자락, 진충묘 바로 앞에는 제3대 현감 이로(15091566), 5대 현감 손회종(16021677), 18대 현감 한광(1643?)의 공덕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중 이로와 손회종은 읍치가 신관리 아래에 있을 때의 현감이었으므로 그 공덕비도 원래 신도리 앞에 있었다. 한광은 원당이 읍치였을 때 현감이었으므로 그의 공덕비는 원래 원당에 있었다.

 

 

자인현청의 읍치였던 원당리

 

1637년 경주부에서 독립할 당시 자인현청은 현 신관리와 신도리 사이에 있었다. 그러다가 1667년 원당으로 옮겼는데, 2년 뒤 1669(헌종 10) 새 공청객사를 지었다. 여기서 32년을 보낸 1699(숙종 25) 가을 향청에 우환이 중첩하여 제27대 현감 김시휘(16501704)가 향인 회의를 통하여 원당에서 현 동부리 자인초등학교 자리로 읍치를 옮겼다. 현청이 있던 곳은 확실치 않으나 구전에 의하면 현재 인지재가 있는 곳이라 한다. 객사는 이 인지재가 있는 곳에서 동남쪽에 있었다 한다. 옥터는 현재에도 원당 사람들이 옥골이라 부르고 있는데 마을 서쪽에 있는 매정산의 서북쪽 기슭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현청이 있던 시절에 우환이 중첩하였다는 것과 관련하여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우환이 강상죄였다고 구전한다. , 아들이 아비와 어미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현청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와는 달리 여러 자료를 참고하면 이곳에 부임한 현감들이 모두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1대 현감 오명로(1643?)1686년 비리로 인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23대 현감 이송제(16481733)1691년 화재로 인하여 다쳐서 파면당했고, 25대 현감 김중남(16361698)1694년 파출 당했다. 또 제26대 현감 오세주(16461698)1696년 어느 하나 선한 곳이 없고, 관리들을 업신여겨 파출 당하고 2년 뒤 사망했다. 결국, 이런저런 사유가 중첩되어 현감 김시휘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인 옛 자산군(慈山郡) 터인 현 자인초등학교 자리로 읍치를 이전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마을에 조선 후기 중국 강남을 갔다 온 여행기를 쓴 최두찬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조선 후기 중국 종단 여행기를 쓴 최두찬

 

영천최씨 원당문중에 최두찬(崔斗燦, 17791821)이란 사람이 있었다. 원당의 의병장 최문병의 8세손으로 부친은 최휘였다. 그는 18175월 장인 김인택이 제주 대정현의 현감으로 갈 때 동행했다. 1년 뒤 18184월 돌아오는 도중 그만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16일 동안 표류하다가 중국 절강성 영파부 정해현(현 저장성 저우산시 딩하이구) 관음사에 겨우 도착하였다. 거기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6개월 동안 필담으로 중국인과 교류하면서 처음 대하는 풍속에 대한 감회 등을 시로 적어 승사록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표류한 인원은 50여 명으로 대부분 서민이었고, 학식을 지닌 사람은 최두찬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히 일행의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되었고, 중국인과 교류할 때 그가 대표로 응대했다.

 

 

최두찬 일행 이동 경로


 

그가 여행한 거리는 무려 약 5,000km에 달한다. 이동 경로는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1단계는 제주도 별도포(현 제주항)를 출발하여 중국 정해현에 도착하기까지 16일간의 표류 단계, 2단계는 정해현을 출발하여 항저우 태평부에 이르기까지 이동하면서 중국 사람들과 시를 주고받던 단계, 3단계는 수로를 따라 북경까지 이동하던 단계, 4단계는 북경에서 책문(현 랴오닝성 단둥시)까지의 귀로 단계이다. 책문에서 조선으로 들어와 자인까지 오는 여정은 기록에서 빠져 있다.

 

최두찬과 일행 이동 경로표




절강성 정해현에서 북경까지의 여정은 수로인 운하를 이용하였다. 배를 타고 간다는 말에 일행이 거부하자 호송관이 위협을 가하였다고도 한다. 그들은 현령의 명에 따라 다음 목적지까지 조선인들을 책임지고 데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일정이 늦어지거나 사고가 나면 호송관이 책임졌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엄하게 대하기도 하였다. 현재도 절강성 항저우에서 북경까지 운하가 있지만, 당시에도 이것이 유용한 이동 경로였다. 북경에서부터 책문에 이르기까지는 도보로 이동했다.

그가 중국인과 주로 시를 주고받은 곳은 항저우시 태평부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16일간 머무르면서 주원관, 양균, 고란 등 50여 명의 중국 인사들과 시로 화답을 하며 교류하였다. 특히, 왕내빈, 이인성 등 여성들과도 시를 주고받음으로써 조선과는 다른 풍속을 접하기도 하였다. 중국인들이 그에게 관심을 둔 것은 크게 세 부분이다. 최두찬이 표류할 때 겪었던 일을 정해현에 머무르면서 기록하여 승사록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이것을 중국인들이 읽어 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가 학식 높은 조선인이며, 한 번도 중국에 와 보지 못한 사람이 중국의 고사를 꿰뚫고 있어 그와 환담하기를 좋아했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훌륭한 문인이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시를 써서 가지고 와 교정을 부탁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그와 일행은 중국인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으며 귀로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조선 최초의 중국 표류기는 1487년 최부가 제주에 갔다가 표류한 후 돌아와서 쓴 표해록이다. 이 책은 그가 조선에 돌아와서 임금의 명으로 기록한 것이어서 정확도가 떨어진다. 그러나 최두찬의 승사록은 매일 일어난 일을 현장에서 기록한 것이어서 좀 더 사실에 가깝다. 특히, 표해록에서는 볼 수 없는 중국인과 필담으로 대화를 하면서 남긴 한시는 중국인들이 시에 대한 흠모가 대단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19세기 초 중국 강남의 풍속과 풍경, 중국인들의 의식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중국의 풍속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승사록에는 최두찬과 중국인들이 쓴 작품 162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중 525일 그가 태평부에 머무를 때 중국인 양균이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시를 요청하여 써 준 1편만 인용한다. 번역문은 필자가 의역한 것이다.

 

천자께서 천하에 책력을 반포하니

조선 또한 한 집안일세.

중국의 장강은 조선의 압록강을 건너고

잠두의 옛 나루터는 양화도를 묻네.

그대와의 우연한 만남은 부평초와 물의 만남이니

높은 곳에 올라 경치를 노래하는구나.

경쾌한 돛단배는 귀향에 도움이 될 것이니

먼 객관에서 탄식하지 말자꾸나.

 

薄海頒正朔 朝鮮亦一家

長江浮鴨綠 古渡問楊花

遇合同萍水 登臨記物華

快帆知有助 旅次幕興嗟

 

그는 원당으로 돌아온 후 강남정(江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을 탐구하다가 3년 뒤 여독으로 사망했다. 그 뒤 1917년 증손 최지영이 강해승사록을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어떤 필사본은 표해록이라고도 한다. 2011년 박동욱이 승사록, 조선 선비의 중국 강남 표류기라는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승사록과 번역본 사진


 

현재, 원당리뿐만 아니라, 자인을 비롯한 경산 지역에 이러한 귀중한 자료를 쓴 최두찬이란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경산시 차원에서 최두찬의 업적을 알리고, 나아가서 최두찬의 이동 경로를 답사하는 등의 프로젝트를 계획하는 것도 경산이 문화의 도시가 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글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이홍우, 양재완(사진작가)
 


<관련사진>

 

용계서원
 

용계서원 경제당
 

용계서원 충현사
 

용계서원 강당
 

용계서원 신도비
 

용계서원 숭의문

 


 

진충묘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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