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전시관
- 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의 사가촌과 거정대를 아시나요?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동지역 편(5) - 남방동과 내동
기사입력 2023-12-13 오전 8:27:40
▲ 남방동 전경
▲ 내동 전경
◆ 역사와 유래
경산시 동부동에서 관할하는 남방동과 내동 지역은 원래 압독국에 속하였다가, 신라 때 압독군(압량군)에 속했다. 고려 시대부터 자인현에 소속되었는데, 이 행정구역은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 시대 행정구역 명칭은 자인현 서면 서이동 남방리와 내동리였다. 그러다가 1895년 자인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내동과 남방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과거 이 지역이 압량소국이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압량면이 생기면서 이 두 마을은 다시 압량면에 속했다. 그 후 1987년 경산읍에 속했다가 1989년 경산시 남방동과 내동이 되었다. 이처럼 이 두 마을을 비롯한 근처에 있는 여천, 유곡, 신천, 평산 등은 역사의 부침에 따라 행정구역이 수시로 바뀌는 경산, 자인, 압량 세 지역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남방동은 조선 후기 김해김씨가 처음 개척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15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마을이었다. 남방리라는 이름이 처음 기록된 자료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다. 당시에는 자인현 남면에 속했다. 그 후에도 남방이라는 이름은 1584년에 기록된 경주이씨 양월 문중에서 보관하던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자인현민들이 자인을 경주부에서 분리하려고 남방리에서 회합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자 남방동은 자인현 서면에 속하였다. 내동은 1500년경 해주오씨가 처음 개척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1300년대부터 존재했던 마을이다. 내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재된 자료는 『호구총수(1789)』이다. 그러다가 1832년 『자인현읍지』에서는 ‘내곡리’라 기록되어 있는데, ‘동’과 ‘곡’은 서로 통하여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마을의 역사가 기록상으로는 이렇지만 실제로는 2세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옛날에는 남방과 내동을 분리하지 않고 통틀어 아방동이라 하였다. 이 아방동은 한자로 아방동(莪芳洞)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앞방동’이라고도 불렀다. 역이 있던 산역동(현 압량읍 강서리) 남쪽에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앞’이 한자 ‘남(南)’과 통하여 남방동(南方洞)이라 부르고, 남방동의 안쪽에 있던 부락은 ‘안골’, ‘내동(內洞)’, ‘아방동’ 등으로 불렀다.

▲ 남방동과 내동 행정지도
이 두 마을이 행정구역상으로 확연한 구분이 이루어진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1888년 『자인총쇄록』 이후의 모든 자료에서는 내동과 남방동이 모두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남방동과 내동은 흔히 ‘아방곡’, ‘아방동’, ‘남방동’ 등으로 아울러서 불렀다. 그런데 이 두 마을은 원래 현재의 마을 터에 있지 않았다. 남방동은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 개울이 돌아가는 곳에 있었고, 내동은 원래 남방동의 개울 건너편 산 아래에 있었다. 남방동이 현재의 위치로 터를 옮긴 것은 1940년대 홍수로 마을이 침수되어 북서쪽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11년에 제작된 지적도에는 현재 마을 터는 논밭으로 되어있고, 원 마을 터에 약 19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옛 마을을 구남방이라 하고, 새로 조성된 마을을 신남방이라고도 한다. 아방동은 구남방을 가리킨다. 내동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은 조선 중기로 추정된다. 특히, 남방동 개울가를 따라 인흥리로 가는 길은 조선 시대 경산에서 자인으로 가는 주된 길이었다. 현감이 행차할 때는 반드시 이 남방동을 거쳐 지나갔다 하여 현감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현재 진못을 통과하여 자인으로 가는 큰 도로는 1910년대 일제가 개통한 신작로이다.
◆ 삶의 터전과 흔적

▲ 남방동 지명지도
이 두 마을은 낮은 구렁과 평야 지대에 위치하다 보니 산과 계곡에 관한 지명은 별로 없고, 주로 논과 들에 관한 지명이 많다.
남방동의 들판은 동쪽에 있는 샘밧(샘바대), 동북쪽 흉년에 죽과 바꿔 먹었다는 죽도가리, 샘밧 서북쪽 진못 밑에 있는 진못밑, 남방 북쪽에 돌이 많다고 하여 돌바대 등이 있고, 논으로는 샘밧 복판에 넓적한 돌이 있었다 하여 넙덕돌배기, 샘밧대보 서쪽에 있는 장구배미, 장구배미 서쪽에 있는 선창아구지, 남방 동남쪽 돌다리가 있었다 하여 돌달걸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잊혀졌다.

▲ 내동 지명지도
내동의 들판으로는 달성서씨 재실 앞에 있다 하여 재궁앞들, 여천동으로 넘어가는 말무덤이 있던 말고개, 북쪽 숲 밑에 있던 ‘숲밑’ 정도가 있었으나 이 또한 현재는 잊혀졌다. 저수지는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유곡에 속하는 신제지가 남아 있고, 내동 남쪽에 앞방골못이 1910년대까지 있었는데, 현재는 매립된 상태다.이러한 마을에 조선 초 대학자였던 사가정 서거정 선생의 조상이 살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 사가촌과 거정대
1914년까지는 자인현이었고, 지금은 경산시에 속해 있는 내동 마을 북서쪽 야산 신제지 안쪽에는 달성서씨 문중 묘가 있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일컬어지며,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무려 6명의 임금을 보필하면서 문장력을 과시했던 사가정(四佳亭) 서거정(1420∼1488)의 증조부 서익진, 조부 서의, 조모 언양김씨의 묘이다.
▲ 거정대 전경
서거정의 증조부와 조부, 부친 서미성(1383∼1431)은 모두 자인현 남면 아방곡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399년 서미성이 관직에 올라 한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권근의 딸과 혼인하여 경기도 임진군에 살면서 서거광(?∼1459)과 서거정을 낳았다. 형 서거광은 세종 때 언양현감을 지냈는데, 나중에 아버지의 고향인 자인에 살았고, 서거정은 계속 한양에 머무르면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 골짜기를 서거정의 조상 묘가 있던 곳이라 하여 ‘거정대(居正垈)’라 하고, 신제지 동쪽에 있던 아방동을 서거정의 호를 따 ‘사가촌(四佳村)’이라 불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씨들이 이곳을 잘 찾지 않게 되자 마을에 살던 박씨들이 아래에다 산소를 쓰면서 위쪽에 있는 서거정 조상 묘의 상석을 뽑아 한쪽으로 치워버려 누구의 묘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 후 후손 서원리(1596∼1663)가 1656년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묘소를 찾아 다시 비석을 세웠으나, 그가 다른 곳으로 이임하자 박씨들이 또 뽑아 버려 묘의 위계와 선후를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서씨 문중에서는 1745년 이곳을 다시 찾아 묘를 단장하고 산소 아래쪽에 제단과 비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 제단과 비석은 지금도 남아 있다.
▲ 거정대 단비
한편, 서거정은 경주부윤으로 가는 양순석에게 경주부 속현 자인현 아방곡에 있는 형 서거광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조상 묘에 가지 못하는 애절함을 시로 써 주면서 각별한 관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 시는 서거정의 문집 『사가집』에 있는데, 번역문만 소개한다.
자인현 안에는 나의 선대 분묘가 계시고
푸른 가래나무엔 묵은 구름이 끼었을 텐데
어느 날에나 분묘에 올라가 분황을 할 수 있고
이때 막걸리 갖고 다시 그대를 만나 볼꼬.
선정의 명성은 예전의 공소와 같을 게고
인물들은 주진의 옛 마을을 상상할 만하겠네.
내 돌아간 형의 처자식이 그곳에 있기에
길이 지주로 인하여 은근한 정 감사하노라.
이 시는 1459년 서거광이 죽은 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증조부, 조부모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성묘를 하지 못하는 죄스러움을 같이 표현하고 있다. 특히, 형수인 서거광의 처 죽산안씨와 조카들이 자인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드러내고 있다. 서거광은 아들 팽소와 팽려에다 딸 하나를 두고 1459년에 일찍 죽었다. 그 딸은 자인 울곡리(현 울옥리)의 영천최씨 최사해와 혼인하여 친정인 아방곡에 살다가 나중에 울곡으로 이거하였다고 「자인묘산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최사해는 원당의 의병장 최문병의 고조부이다. 이렇듯 외로이 살고 있는 형수와 조카들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경주부윤으로 내려가는 양순석에게 보살펴 줄 것을 시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또 다른 시에서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 또한 『사가집』에 실려 있는데, 번역문만 소개한다.
나의 선영은 자인에 있어
백 년 된 무덤에 잡초가 우거졌을 터인데
공명이 나를 이렇게 얽어매니 어찌할꼬.
성묘 벌초도 못한 지가 지금 사 년이라네.
더구나 내 고향 전원은 달성에 있건만
가려면서도 못 가고 속으로 슬퍼할 뿐일세.
*이 시는 원작이 56행의 칠언고시인데, 후반부 자인에 관한 내용만 인용하였다.
한편 서거정의 후손 서종화는 1745년 이곳을 찾아 산소를 단장하고 옛 마을 터를 둘러보면서 서거정이 쓴 시를 원운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감회를 노래하였다. 이 시는 『약헌유집』에 실려 있는데, 역시 번역문만 소개한다.
자인선산설단행사 2
자인의 남쪽 못 안은 내 조상님의 분묘인데
온갖 수풀과 길한 봉우리가 구름같이 둘러쌌네.
나라의 은혜를 입어 태평한 세상이 되었으니
지체 높은 가문에 높은 벼슬은 더욱 부원군 덕일세.
나그네가 영지(靈芝) 소반을 칭찬하니
주민들은 오히려 사가촌을 말하네.
천년의 향불이 지금부터 이어지도록
이웃 사람을 향해 정성스럽게 부탁하네.
현재 달성서씨 사가공파에서는 매년 4월 5일 한식날 이곳에 직접 와서 제를 지내고 있다. 2023년 겨울에 찾아본 거정대는 한눈에 보아도 명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신제지 바로 위 언덕에 자리 잡고, 세월의 깊이를 보여주는 울창한 소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록된 대로 서거정의 조상 묘 아래에는 박씨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것 또한 세월의 깊이를 보여주듯 비석과 상석에는 이끼가 있었다. 무덤 오른쪽 숲 근처에는 기록과 구전을 뒷받침하듯 상석들이 여기저기 치워져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무덤을 두고 갈등을 벌였을 박씨와 서씨들은 이제 화해하였을까?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jpg)
.p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