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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화의 상징적 마을 조곡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남산면 편(3)
기사입력 2023-08-28 오전 8:11:10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식은 고대부터 있었다. 그래서 산 자는 죽은 자가 좋은 곳에 묻혀야 자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의식으로 죽은 자를 좋은 곳에 묻고 그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자신을 숭배할 후손을 얻기 위하여 명산대천을 다니면서 아들 낳기를 바라는 기복 신앙이 나타났다. 이러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 의식은 유교가 정착하면서 철학적·윤리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유교에서는 가족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으로 시조를 꼽는다. 그래서 각 성씨는 시조를 배향하고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도모한다. 이것의 물리적 발현이 족보 작업과 사당 건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밑바닥 계층까지 스며들어 향촌에 있던 성씨들도 족보 편찬과 사당 건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는 이것이 제도화되어 관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왕권이 약해지는 19세기 말∼20세기 초부터 각 성씨는 시조를 찾고, 그들의 업적을 발굴하여 문집 편찬, 족보 제작, 재실 건축 등의 붐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먼 조상에 대한 ‘보은’과 ‘충효’를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아 다른 집안과 차별성을 갖도록 하였다. 전국의 사당이나 재실에 ‘원(遠)’, ‘보본(報本)’, ‘모(慕)’, ‘충’, ‘효’라는 어휘가 많이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 조상 숭배 의식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현재는 서구 가치관의 유입으로 많이 희석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상 숭배 의식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나아가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남산면 조곡리 마을이다.
▲ 남산면 조곡리 마을 전경

▲ 조곡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조곡리는 조선 시대 자인현 하남면 동이동 조곡리였다. 그 후 마을 규모가 커지자 윗마을(이리실·새마)은 상조곡리, 아랫마을(점촌)은 하조곡리로 분리되었다. 1895년 자인현이 군으로 변경되면서 상조곡리는 조곡동으로, 하조곡리는 조점동으로 바뀌었다가 1911년 동리 명칭 변경 때 다시 조곡동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자인군 하남면 조곡동에서 경산군 남산면 조곡동으로 되었다가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조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이리실, 점촌, 새마 전경
조곡리는 크게 세 개의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입구 사거지 서쪽 일산딩이라는 산 아래에 점촌이라 부르는 각단, 조곡리의 중심으로 이리실이라 부르는 각단, 이리실 서북쪽 초막골에 새로 터전을 닦은 새마라 부르는 각단이다. 제일 아래에 있는 점촌은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1895년 독립된 행정동으로 분리되어 조점동라 하였다. 이리실은 조곡리의 원 촌락으로 아침 일찍 햇살을 받은 이슬이 반짝인다 하여 이리실로 불렀다. ‘새마’는 새로 터를 닦은 마을인데 이리실과 함께 상조곡리에 속했다. 이 중 제일 오래된 각단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이리실이다. 이 마을에 관한 기록은 1469년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 처음 보이는데, 당시는 조을곡리(早乙谷里)라 하였다. 이는 이두식 기록인데, 현실음은 ‘졸곡리’ 정도로 읽을 수 있다. 당시 조을곡리는 현 조곡리와 송내촌락, 반곡촌락, 전지촌락 등을 아우르는 큰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행정구역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조을곡리는 새마와 이리실을 합한 상조곡리, 점촌과 송내·중리를 합한 하조곡리, 외반과 내반을 합한 반곡리, 전지리, 진방리 등으로 분리되었다. 또 19세기 중엽 하조곡리의 송내촌과 중촌이 송내리와 중리로 독립되어 조곡리에서 분리되었다.
이처럼 조곡리는 넓은 지역과 여러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전하는 바로는 1500년 초 경산현령을 지낸 탐진 안씨 안인석이 처음 들어와 개척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469년 이미 조을곡리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자료가 있으므로 신라나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조곡리 지명 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반달딩이, 분도등, 일산딩이, 밤골산 전경
조곡리는 남산면 동남쪽 깊은 골짜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서남쪽 삼성산, 남쪽 새치궁산, 북쪽 밤골산 사이 깊은 계곡이 북동쪽으로 뻗어 내려 오목천으로 향하고 있다. 산등성이로는 남서쪽 넓은 공터가 있는 공짓딩이, 남쪽 반달처럼 생긴 반달딩이, 반달딩이 남쪽에 넓적하다 하여 넓적딩이, 넓적딩이 서쪽 사부량지 등이 있다. 또 마을 서쪽 삼성산은 일명 도치산·상왕산 등으로 부른다. 약수지 서쪽 등성은 풀무간(대장간)이 있어 풍덕딩이(분도등)라 하고, 그 아래 삼밭이 있어 삼밭딩이라는 등성이가 있다. 그리고 불당지 남서쪽 남천 신방리로 넘어가는 곳에 묵방미기라는 고개가 있고, 상대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중방고개가 있다. 새마 북쪽에 있는 뒷산은 뒷등이라 한다. 점촌 뒤쪽은 일산을 닮아 일산딩이라 하고, 그 아래 장구모양을 닮은 장구딩이가 있다. 일산딩이 북서쪽 높은 산은 조곡에서는 밤골산이라 하고, 반곡에서는 모산이라 한다.

▲ 생잇골, 약골, 초막골, 불당골 전경

▲ 갓골, 모산골, 수렁골, 나발딩이, 대밭골 전경
이러한 산과 등성이 사이사이로 많은 골짜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새치궁산과 사부량지 사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고 하여 생잇골이라 한 골짜기, 풍덕딩이와 공짓딩이 사이 약수지가 있어 약골(양골)이라는 골짜기가 마을의 서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서쪽으로는 옛날 탐진 안씨 입향조가 부친의 산소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초막골이 있고, 초막골 서쪽 독자지 위에 갓을 닮았다 하여 갓골(관동)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독자지 동남쪽 골짜기는 불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당골이라 한다. 마을 북쪽 후당지 위 반곡2리로 넘어가는 곳은 못 안에 있다고 하여 모산골이라 한다. 점촌 동남쪽 사거지 건너에는 나팔을 닮은 나발딩이가 있고, 그 서남쪽에 대나무가 많아 대밭골(은밭골)이라 한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은 해방 전까지 비상이라 부르는 비석(砒石)을 캐는 광산 터였다. 이리실 남쪽에는 수룡골(수렁골)이 있고, 여기서 연하리 먹실마을로 넘어가는 곳은 배나무골과 배남고개라 한다. 그리고 수룡골 서쪽 공짓딩이로 가는 골짜기에는 새척듬이라는 골짜기도 있다. 또 먹으면 병이 나았다고 하는 약수탕이 양골 약수지 위에 있었고, 물을 마시면 장군처럼 힘이 세졌다는 장군수(용새미)라는 샘이 불당골 입구에 있었다. 관동이라 부르는 동산에는 말의 발자국 모양을 닮은 말자죽바위, 생잇골 북쪽에 마당처럼 펀펀한 마당바우, 말자죽바위 밑에 가마처럼 생긴 가매바우가 있다.

▲ 노거수, 뒷당들, 새치궁산, 사부량지 전경

▲ 불당지, 약수지, 독자지, 사거지 전경
이처럼 골짜기가 많다 보니 골짜기 사이사이로 개척한 농토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크고 작은 저수지가 무려 10여 개가 있는 저수지의 마을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전하는 제일 오래된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등재된 조을곡리제(早乙谷里堤)다. 이 저수지는 현재 새마라 부르는 상조곡리 서남쪽 불당골에 있는데, 당시 마을 이름을 따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300여 년 뒤에 편찬된 『여지도서(1765)』에서 상조곡제(上早谷堤)라 한 이후 모든 자인현읍지에서 상조곡제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불당지(佛堂池)로 불리고 있다. 기록상으로는 500여 년 되었지만, 자료에 등재되기 전에도 있었던 것이 확실하므로 최대 신라나 고려 때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저수지로 정부 차원에서 보존할 필요가 있다. 이 저수지가 불당지로 명명된 이유는 이곳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절은 빈대가 많아 태워버렸다고 하는데, 전형적인 폐사 전설이 여기에도 적용되어 있다.
또 불당지 동남쪽 풍덕딩이 산 너머에는 약수지라 부르는 저수지도 있다. 마을에서는 이 못 안 샘에서 약수가 나왔는데,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나았다고 하여 그 아래에 있는 저수지를 약수지라 불렀다고 한다. 이 저수지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자료는 『여지도서』이다. 자료에는 약수동제(藥水洞堤) 또는 약수곡제(藥水谷堤)라 기록되어 있다. 1469∼1765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서북쪽 새마 북서쪽에 독자지(獨子池)라는 저수지도 있다. 이 저수지는 『여지도서』에서는 독자동제(獨子洞堤), 『자인현지(1786)』에서는 독자곡제(獨子谷堤)라 등재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혼자 축조했다 하여 독자지라 하였다고도 하고, 신라의 어떤 왕이 아들이 없어 이 골짜기에 있는 암자에 기원을 드린 후 아들을 낳았다 하여 독자지라 명명되었다고도 한다. 후자의 전설은 『자인현읍지』 신림사에 딸린 성재암을 소개하는 부분에도 등재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왕이 아들이 없어 성재암에서 기도하니 과연 현명한 아들을 얻었다. 그 까닭에 산 아래에는 독자동이 있고, 그 위에는 상왕산이 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이 기도한다고 한다. 지금은 폐철되어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이종대의 『자인의 맥』에서는 “현남(縣南)”을 “현서(縣西)”로 오독하여 독자동을 대구한의대 아랫마을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여천은 현남이 아니라 현서 지역이었다. 그리고 독자동의 동(洞)은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곡(谷)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 독자지에 관한 기록이 『여지도서』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1469∼1765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산의 호소』에서는 이 저수지가 1729년 축조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자료를 근거로 하였는지 불명확하다.
그리고 『여지도서』에서는 성조동제(聖造洞堤)라 하고, 『자인현지』에서는 성조곡제(聖造谷堤)라 한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성재암이 있던 성재골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조곡리 독자지 위 골짜기도 일명 갓골이나 성줏골이라 하고, 내반곡리 남서쪽 깊은 골짜기도 성줏골이라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이 지역 전체가 조을곡리 지역이라서 내반곡리의 성재지를 조곡리의 성재지로 등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곡리 독자지 위에도 147평 정도의 저수지가 있는데, 이것을 조곡에서는 갓골못 또는 성좌지라 불렀다. 조곡리 성좌지는 옛날 산신령이 앉아서 물을 마셨다고 하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이 샘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저수지 또한 1469∼1765년 사이에 축조되었다.
하조곡리라 부르는 점촌 앞에도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이 또한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자료에는 하조곡제(下早谷堤)와 사어내제(沙於乃堤)라 각각 등재되어 있는데 이 둘은 별개가 아니고 하나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저수지를 축조할 때 사거리에 축조되어 사거지(四巨池)라 했다고 하나 이는 민간어원설이다. 사어내제는 향찰식 기록으로 우리말로는 ‘모래내못’ 정도로 읽을 수 있다. 조곡리에서 송내리로 흐르는 시내를 모래가 많아 ‘모래내’라 하였는데, 여기에 축조된 저수지라서 사어내제[모래내못]라 명명하였다. 이후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서 ‘사어지→사거지’로 변형된 것으로 재구된다.

▲ 수렁못, 배나못, 후당지, 송내지 전경
이외에도 자인현읍지나 기타 자료에 등재되지 않았지만, 조선 시대에 축조된 저수지가 여럿 있다. 이리실 남쪽 수렁골(수룡골)이라는 골짜기에 축조된 수룡지(수렁못)와 연하리 먹실마을로 넘어가는 배남고개에 축조된 배나못, 이리실 북쪽 내반곡리로 넘어가는 모산골과 질고개라는 골짜기에 축조된 후당지가 있고, 조곡리 마을회관 남쪽 새척듬 입구 664번지에도 약 70평 넓이의 작은 저수지도 있었는데, 현재는 매립된 상태다. 그리고 양골 남쪽 생골 끝에는 생잇골못이라는 저수지도 있는데, 이는 해방 전후에 축조되었다. 또 마을 입구 점촌 사거지 아래 송내리와 조곡리의 경계에 큰 저수지가 있는데, 이를 송내지라 한다.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저수지다.
◆ 조상님 걷던 옛길

▲ 조곡리 옛길 지도 : 파란색(옛길), 노란색(신작로)
조곡리 시작 길은 마을 어귀 37번지 송내지 옆 삼거리다. 동북쪽은 송내리, 서북쪽은 외반곡리(반곡1리)로 가고, 남서쪽이 조곡리로 들어가는 길이다. 옛날에는 이 삼거리 중간에 밭과 묘지가 있었는데, 현재는 길로 바뀌었다. 조곡리로 들어오는 방향에서 왼쪽 골짜기는 모두 논이었는데, 1970년대 송내지가 축조되면서 수몰되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사거지 아래 175번지가 나오는데, 여기서 남쪽은 사거지 쪽으로 가는 아랫길, 그대로 직진하면 조점리 마을 가운데로 가는 윗길이 있다. 이 윗길은 조점리 마을 안쪽을 가로지르다가 한쪽은 후당지 산길로 이어지고, 한쪽은 다시 마을 앞으로 나와 151번지에서 사거지 쪽에서 갈라진 아랫길과 만나 이리실로 향한다. 이 길이 바로 옛날 조곡리로 들어오는 주 진입로였다. 이 길은 이리실 안지신도비각에 닿았고, 여기서 한쪽은 직진하고, 다른 쪽은 남쪽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모세 혈관처럼 여러 골목길로 나뉘어 집집이 대문까지 닿았다. 이 길을 통하여 옛날 조곡리 아낙네들은 바구니를 이고 닷새마다 자인장으로 갔고, 선비들은 자인향교에 가 학문을 닦았다. 근대 이후에는 도회지로 돈 벌러 가거나 공부하러 가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 흘린 어머니의 사연 등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오고 나갔다.
현재 마을 주 진입로는 사거지와 일산딩이 사이, 그리고 조곡천(개울) 남쪽 가를 따라 뚫린 새 길(사진 신작로1·2)인데, 이 길이 생겨나면서 옛길은 흔적만 남아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현 조곡서원에서 연하리로 가는 옛길은 이여정과 배남지 못 동쪽 것냇갓이라는 산 밑으로 난 작은 길이었는데, 이 또한 반달딩이와 수렁못 사이로 신작로(사진 신작로3)가 생기면서 조상님들이 나뭇짐을 지고 오르내리던 옛길은 묻혀 버렸다. 또한 새마로 가는 고갯길(사진 신작로4)은 크게 확장되어 내반곡리(반곡2리)로 향한다. 이 외 새마 독자지, 불당골 불당지, 양골 약수지, 생잇골로 가는 옛길은 아직 잘 보존되어 조상님들이 닦아 놓은 길 위에서 후손들이 삶을 꾸려가고 있다.(옛길 자료는 1912년 작성된 지적도와 현지조사를 토대로 했음)
이처럼 저수지가 많고 옛길이 살아 있는 조곡리에 조상을 추향하면서 후손 교육의 근본으로 삼는 유교 유산이 무려 일곱 군데나 있어 유교 문화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의식 없는 사람이 의식 없는 사람에게 팔아먹기 위하여 의식 없는 행동을 하는 일이 종종 있어 여기에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냐의 의문도 있지만, 오히려 이렇게 공개하는 것이 유산을 보존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개괄적으로나마 소개한다.
◆ 탐진 안씨 문중의 조곡서원
▲ 조곡서원 전경
- 조곡서원의 역사
조곡서원의 뿌리는 고려 때 평장사 안우와 「용비어천가」 창작에 참여한 조선 초 학자 안지를 배향하기 위하여 1794년 세운 세덕사(世德祠)에서 출발한다. 안지의 후손 안점(1741∼1808), 안여항(1745∼1815), 안여송(1747∼1812)이 1783년 자인현민과 함께 사당을 건립해 달라고 예조에 청원한 지 10년 만에 마을 서남쪽 분도등(芬道嶝)이라는 산등성이 아래에 건립하였다. 이때 위패를 봉안하면서 의성에 살던 회병(晦屛) 신체인(1731∼1812)이 「조곡세덕사봉안문」과 「상향축문」을 썼다. (회병집에는 ‘세덕사’, 자인현읍지(1891)에는 ‘조곡사’, 문중 자료에는 ‘조곡서원 충현사’라 기록되어 있음. 아래 내용은 조곡리 탐진 안씨 문중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음)
이후 1806년 제74대 자인현감 정일태(1760∼?)가 부임하여 1808년 사당을 방문하자 문중에서 그에게 사당 편액과 재실의 편액을 써 달라고 하여 ‘충현사’와 ‘조곡서원’ 현판이 제작되었다. 1833년에는 벽진 이씨 만취(晩翠) 이현(1776∼1843)이 쓴 「조곡서원창건기」를 걸어 놓았다. 그러다가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폐철되었다. 이듬해 1869년 10월 현 조곡서원 자리에 상경재(尙敬齋)를 건립하고, 1900년 봄 상경재 뒤에 충현사를 재건했다. 1950년 서원의 정문인 향도문을 건립하고, 1951년 동재라 칭하는 문정 고은공 부조묘를 건립하면서 상경재 현판이 달린 본채를 조곡서원 현판으로 교체하였다. 1994년 원 조곡서원 자리에 조곡서원유허비를 세우고, 서원 정문 앞에 조곡서원 창건 200주년 기념비도 건립하였다. 그 뒤 2000년 본채를 홍교당으로 개칭하고, 2005년 지붕을 동기와로 교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조곡서원 구조

▲ 조곡서원, 충현사, 향도문, 경앙문 현판
조곡서원은 크게 정문, 동재와 서재, 강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원의 정문인 향도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다. 좌우에는 각 1칸씩의 행랑칸을 두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은 동재, 왼쪽은 서재이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우진각 지붕에다 동기와를 올려놓았다. 서재 또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팔작지붕에 동기와를 올려놓았다. 강당에 해당하는 홍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좌우 각 1칸은 방, 중앙 2칸은 마루에 툇마루를 내어 놓았다. 지붕은 팔작에 역시 동기와를 올려놓았다. 홍교당 뒤쪽에 내삼문인 문 3개의 경앙문이 있다. 맞배지붕에 동기와를 올려놓았다. 경앙문을 들어서면 사우인 충현사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역시 동기와를 올려놓았다. 기둥은 붉은색, 서까래와 종도리, 대들보 등은 오색단청을 하였다. 안에는 목재 제상(祭床)을 만들어 그 위에 흔히 교의(交椅)라는 작은 의자인 시동(尸童)을 놓고 안우의 ‘오성군 안공 신위’ 위패와 안지의 ‘고은공 안선생 신위’ 위패를 봉안해 놓았다. 위패는 독(함)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 조곡서원 게판문

▲ 상경재, 홍교당, 계몽재, 문정고은공부조묘 현판
현재 조곡서원에 걸려 있는 현판은 문호 편액 ‘향도문(嚮道門)’, 동재 편액 ‘문정고은공부조묘’, 서재 편액 ‘계몽재(啓蒙齋)’, 강당에 걸려 있는 서원 편액 ‘조곡서원’, 당호 편액 ‘홍교당(弘敎堂)’과 ‘상경재(尙敬齋)’, 내삼문 편액 ‘경앙문(敬仰門)’, 사우 편액인 ‘충현사(忠賢祠)’ 등 모두 8개가 걸려 있다. 그리고 강당인 홍교당 안에는 1833년 칠곡에 살던 벽진인 이현이 쓴 「조곡서원창건기」, 1919년 경주에 살던 이중구(1851∼?)가 쓴 「상경재기」, 1962년 군위에 살던 전주 이씨 이기철(1897∼1971)이 쓴 「조곡서원복향기」 게판문이 있다. 그리고 안지의 시를 옮겨 적은 「제문명루」, 조유승, 한동유, 김만주, 조서규 등의 한시 게판문, 1897년 자인향교 도유사(현 전교)를 역임한 안병희(1854∼1939)의 「상경재원운」, 안효곤(1843∼1929), 안응곤(1884∼1948)의 한시 등 모두 9개의 게판문이 걸려 있다. 이외에도 한시를 새긴 게판문이 여럿 있는데 안병희가 자인향교 도유사로 있을 때 현감이었던 제120대 자인현감 조유승(재임 1894∼1897)이 쓴 시를 필자가 번역하여 소개한다.

▲ 자인현감 조유승 한시 게판문
재실과 사당은 높고 이름 또한 아름다운데
계곡과 산은 그윽하고 경치는 한량없네.
묵화에는 봄이 따스하고 풀 향기는 그윽한데
책장에는 바람이 불고 회화나무는 그림자 지네.
지금은 많은 선비가 글을 읽는 방이지만
옛날에는 현인을 숭상하며 제사를 지내던 집이었네.
내 비록 유학의 교화를 일으킬 겨를이 없지만
매번 가주를 바라보며 회포를 읊는다네.
*묵화 : 먹으로 쓴 글씨
*가주 : 가주(嘉州)라고도 하는데 소식과 관련 있는 지명이다.
- 안우·안지 숭모 사업
조곡리 탐진 안씨 문중은 고은 선생의 문집인 『고은선생유고』를 1912년 목판본으로 발간했고, 1934년 『고은선생문집』을 목판본으로 다시 발간하였다. 그리고 중간본을 번역한 『고은선생문집역(1988)』, 『조곡서원(2009)』, 『증정 고은선생문집(2015)』을 발간하였다. 또 ‘조곡서원보존위원회’와 ‘전국 탐진안씨 보학교육회’를 조직하여 서원 관리와 후손 교육도 하고 있다. 그리고 조곡서원은 경산시 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가 2023년 경산시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 안지 신도비

▲ 신도비각 전경
조곡리 탐진 안씨 문중은 1914년 10월 이리실 마을 입구에 「고은안선생신도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에 한해 무덤으로 가는 입구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안지가 높은 벼슬을 하였기에 ‘신도비’라 명명하였고, 장소는 안지를 배향하는 재실이 있는 마을 입구에 세웠다. 비문은 풍산 류씨 류도헌이 1906년 쓴 것인데, 안병희와 종손 안종찬이 대표로 약 8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세웠다. 하단 받침인 귀부는 거북, 비신은 오석(현석)에다 해서체의 글씨로 썼고, 윗부분은 고깔 모양의 가첨석을 씌웠다. 비신 정면 상단에는 ‘고은안선생신도비’라 제목을 크게 새긴 후 아래 작은 글씨로 비문을 새겼다. 뒷면 역시 상단에 ‘문정공 안선생 신도비’라 크게 제목을 붙이고 하단에 비문을 새겼다.
비각은 네 개의 기둥에 맞배지붕을 얹고 잡귀를 막기 위한 홍살창을 사면으로 달았다. 특히, 정문 양쪽에 태극문양이 달린 삼지창을 달아 강한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도리와 창방 사이에는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 문인방 사이는 비워 두어 영혼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했다. 처마와 익공 부분은 모로 단청을 하여 당시로는 많은 경비를 들여 상당히 고급스럽게 건축하였다. 그 후 비각이 낡아 1984년 전체적으로 중수하였는데, 이때 비각 바깥에 화강암으로 된 난간도 설치하였다.
◆ 탐진 안씨의 영모재
▲ 영모재 전경
영모재는 안지의 증손 안인석(1471∼1506)을 추향하는 재실이다. 처음에는 안인석이 서재로 지었고 그의 사후 재실로 사용되다가 1876년(기묘년) 중창하였다. 그 후 조곡사를 창건한 6대조 안여송을 추모하는 ‘모 송오 인산 기념관’을 건립한 대구 인산약국 약사 안용욱(1924∼?)이 중수하였고, 최근 한 번 더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6년 안응곤이 짓고 안윤욱이 쓴 「영모재중건기」 등 몇몇 게판문이 걸려 있었는데, 현재는 영모재 현판만 걸려 있다.

▲ 영모재 현판
안인석은 원래 김제 평고리(현 용지면)에 살았는데 음사로 경산현령을 역임하는 도중 부친 안수명이 별세하자 조곡리에 장지를 마련하고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벼슬을 그만둔 후 부친의 묘가 있는 조곡리에 정착하여 탐진 안씨 조곡 입향조가 되었는데, 이때가 1500년대 초반이다. 안인석이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한 골짜기를 아직도 초막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초막골 서쪽 독자지 위 골짜기에 영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영모재는 경사진 산기슭에 위치하여 올라가는 계단을 길게 만들고, 계단 좌우에는 돌로 된 망주석을 세워 놓았는데, 왼쪽에는 안여송의 호를 딴 송오재(松塢齋), 오른쪽은 영모재(永慕齋)라 새겨져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시멘트로 된 축대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좌우 각 방 1칸, 중앙은 마루로 된 본채가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최근 보수하면서 현대식 기와로 교체하였다.
◆ 탐진 안씨의 이여정(율산당·보본재)
▲ 이여정 전경
이여정(二如亭)은 탐진 안씨 조곡리 입향조 안인석의 고손자(현손) 안종로(1596년생)를 추향하는 재실 겸 서당이다. 처음 이여정이라 했는데, 정호(亭號)는 『중용』의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후에 안종로의 호를 따 당호는 율산당(栗山堂), 재호는 보본재(報本齋)라 하여 이 세 현판이 모두 걸려 있다. 이여정은 안종로 이하 후손들이 묻힌 것냇갓이라는 산 아래 수렁골에 있는데, 1926년(병인년) 후손들이 재사를 짓기 시작하여 1928년(무진년) 완공하였다.

▲ 이여정, 율산당, 보본재, 상량문 현판
안병희가 쓴 「이여정기」에 따르면 안종로는 평소 밤나무 심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호를 율산거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의 6형제와 종형제(4촌) 충로, 승로, 계로와 함께 벼슬살이를 마다하고 효와 우애로 살았다고 하여 고을에서는 구로(九老)라 칭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을에서 구전하였는데, 1926년 묘 아래 있던 밭에다 이여정을 지어 안종로 이하 조상들을 추향하는 재실 겸 서당으로 사용하였다.
이여정은 정면 3칸에 왼쪽 마루칸은 앞으로 길게 누마루를 내고 처마 밑에다 ‘이여정’ 현판을 달아 놓았다. 가운데 방 위에는 ‘율산당’, 오른쪽 방 위에는 ‘보본재’ 현판이 걸려 있다. 이외에 한시 게판문 8개, 자인 읍척리 최두현(1868∼1939)이 쓴 「이여정상량문」, 안병희와 정원영이 쓴 「이여정기」 2개 등 모두 11개의 게판문이 걸려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고 처마 끝에는 함석 물받이를 설치해 놓았다. 담장은 흙담이다.
◆ 탐진 안씨의 수성재
▲ 수성재 전경
수성재(修誠齋)는 탐진 안씨 조곡리 입향조 안인석의 고손자(현손) 안방로와 그 직계 후손을 추향하는 재실로 안석락의 아들 3형제 안택규, 안택희, 안택서 후손들이 1986년 건립하였다. 안방로는 보본재(율산당)의 추향조인 안종로의 맏형으로 6형제와 종형제 3명과 더불어 학식과 우애가 깊어 향리에서 구로(九老)라 불렀다.

▲ 수성재, 삼우정 현판
수성재는 이리실 안지신도비 북쪽에 있는데, 맞배지붕으로 된 대문과 본채, 좌우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왼쪽은 마루, 오른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는데, 방 앞에 수성재 현판, 마루에 3형제의 우애를 기리는 삼우정(三友亭)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은 원주로 주련은 없다. 왼쪽 건물은 4칸 방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현대식 기와로 새로 단장한 상태고, 담은 시멘트 벽돌담으로 되어 있다. 현재 마당 안에는 「수성재창건기념비」, 「춘와공·통덕랑·무과공 묘비건립비」, 「안재관공적비」, 「탐진안씨14세4대설단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탐진 안씨의 송암정
송암정(松菴亭)은 자인현 상북면 훈장과 1898년 자인향교 도유사(현 전교)를 역임한 안계환(1830∼1905)을 추모하기 위하여 아들 안효곤(1878∼1961)이 1930년대 세웠다. 자인 읍척리에 살던 양천 최씨 최두현이 쓴 「송암정기」와 진량 안촌리에 살던 김해 김씨 김홍배(1877∼?)가 쓴 「송암정상량문」이 있었다. 위치는 것냇갓이라 부르는 조곡리 산 20번지 하단 기슭에 있었다.
◆ 김녕 김씨 문중의 삼의재
▲ 삼의재 전경
- 김녕 김씨의 입향 내력
삼의재(三宜齋)는 김녕 김씨 충의공파 김기천(1649∼?)과 그 이하 후손들을 추향하는 재실이다. 김기천은 세조 때 단종 복위 사건인 병자사화(1456)에 연루되어 순절한 백촌 김문기의 9세손으로 후손들은 사화 이후 전국으로 흩어져 목숨만 겨우 부지하였다. 충청도 영동으로 피신한 김기천의 조상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핍박을 당했고, 이에 김기천이 자인현 쟁광리(현 일광1리)로 피해 들어왔다. 그는 아들 하나 손자 셋을 두었는데, 본인과 아들 김은생, 장손 김석민(1684∼1719)은 쟁광리에 살았다. 김석민(진민)이 1719년 사망한 후 그의 처 월성 최씨가 김진명(1686∼?)·김진선(1688∼?) 두 시동생과 가솔을 데리고 18세기 초엽 조곡리로 들어왔다. 그래서 조부 김기천을 조곡리 입향조로 모시게 되었다.
- 삼의재 건축 과정

▲ 삼의재, 식호문 현판
쟁광에서 조곡으로 이거한 김녕 김씨는 줄곧 이곳에 살면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다가 1938년 후손 김형규를 비롯한 문중 구성원이 조상을 추향하고 후손을 가르칠 재사를 마련하기로 합의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가을 삼의재를 완공하였다. 그때 같은 마을 탐진 안씨 안병희가 「삼의재기」를 썼다. 재호를 삼의재라 한 것은 입향조 김기천의 손자가 세 명인 데서 착안하여 삼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어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삼의재 구조
삼의재가 있는 곳은 조곡리 새마 뒷등 아래로 조선 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대지였는데 이곳에다 삼의재를 지었다. 재실은 원래 자연석 축대를 쌓아 세 칸의 솟을대문을 만들었는데, 최근 축대 위에 대리석으로 단장하였다. 문호는 ‘식호문(式好門)’으로 『시경』 「사간」에 “형과 아우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式相好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후에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 구절이다. 글씨는 제양(濟洋)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썼는데 낙관이 독특하다. 재호는 ‘삼의재’이고,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앞에는 툇마루를 내고, 네 개의 기둥에는 주자의 「경재잠」에 나오는 구절을 주련으로 제작하여 달아 놓았다. 이외에도 후손 김태환이 쓴 「삼의재원운」, 1939년 후손 김도환이 쓴 「삼의재기」, 김재만이 쓴 「삼의재기」, 같은 해 1939년 국한문혼용으로 제작한 「삼의재기」 등이 걸려 있다. 후손 김태환이 쓴 「삼의재원운」 한시 게판문을 번역문만 소개한다.

▲ 삼의재 원운
우리 선조 당년의 훌륭한 업적 찾으니
푸른 산 깊은 곳 몇 칸의 띠집이네.
안개는 아침저녁 몇 겹으로 둘러 있고
뜰의 대나무는 봄가을 난간의 숲을 둘렀네.
봄가을로 배알할 때 더욱 절기를 느끼고
가업은 대대로 전하니 더욱 마음에 새기네.
바라건대 여러 후손은
즐거움이 책에 있으니 길이 외고 읊으리.
◆ 마을 현황
이처럼 많은 유교 유산을 보유한 조곡리는 1888년 이리실과 새마를 합한 상조곡동이 83가구, 하조곡리(조점리)에 15가구가 살았다. 1912년에는 이리실 개울 북쪽 촌락에 34가구, 개울 남쪽 촌락 27가구, 초막골에 5가구, 독자지 아래 새마에 15가구, 생잇골에 3가구, 조점리에 15가구 등 모두 99가구가 산 대규모 마을이었다. 현재는 122가구에 226명이 등록되어 있는데, 출향한 사람이 귀향하고, 또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 주민 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마을에는 16세기 초에 들어온 탐진 안씨가 약 34가구, 200여 년 뒤 18세기 초에 들어온 김녕 김씨가 약 24가구로 마을의 주 성씨를 이루고, 그 외 다른 성씨도 있다. 주민들은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포도와 복숭아 등 과수업에 주로 종사하고, 벼농사를 짓고 있는 가구도 있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이리실
모산골 북쪽 질고개에 복사꽃이 왔네요.
꽃이 차암 이뻐서
불당골 불당지 나물 캐던 처녀
어머나! 꽃이 되었다 카네요.
수렁골 남쪽 배남골에 배가 왔네요.
배가 차암 주렁주렁하여
용새미 물 먹고 것냇갓 소꼴 베던 총각
무시라! 배가 되었다 카네요.
딧당들 서쪽 새마에 단풍이 왔네요.
단풍이 차암 울긋불긋하여
초막골 독자지 아들 빌던 아낙네
우야꼬! 단풍이 되었다 카네요.
나발딩이 동쪽 점촌에 함박눈이 왔네요.
눈이 차암 하늘처럼 하예서
일산딩이 옹기 굽던 눈 먼 영감
아이고! 눈이 되었다 카네요.
꽃과 배와 단풍과 눈이
새치궁산 놀러 갔다가
약수탕 한 모금 이슬로 머금고
옹기종기 살다 보니
허허 참! 이리실이 되었다 카네요.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정명환 작가
지명 감수 : 안병권(94세, 조곡리 주민)
<사진 자료>

▲ 안지 신도비

▲ 안지 신도비 가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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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지 신도비 거북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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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지 신도비 도리창방 용조각

▲ 안지 신도비 정문 태극삼지창

▲ 삼의재 식호문


▲ 삼의재 전경



▲ 영모재 전경

▲ 영모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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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재 전경

▲ 수성재 비석
▲ 조곡서원 전경

▲ 조곡서원 창건 200주년 기념비

▲ 조곡서원 향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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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여정, 율산당, 보본재

▲ 독자지

▲ 불당지

▲ 조곡리 마을회관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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