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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삼의사(鄭氏三義士)의 얼이 서린 옥곡동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동지역 편(4)

기사입력 2023-07-28 오전 9:50:17

성암산 아래 자리한 옥곡동(玉谷洞)은 초계정씨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창의한 정변함(鄭變咸), 정변호(鄭變護) 형제와 사촌 정변문(鄭變文)이 개척한 동네이다. 개척한 마을은 옥곡동 또는 옥실이라 했고 골짜기 뒤는 옥()이 나왔다고 하여 옥골 혹은 돌산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이 자리에 경산현의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다고 하여 옥실(獄室) 혹은 옥곡(獄谷)이라고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 도잠암골, 딧골 등의 골짜기, 옥실들, 홈뚝 등의 들판, ()인 새도랑, 바위인 배락바우, 굼각단 등의 명칭이 전해진다. 배락바우는 바위가 벼락을 맞았다는 데 연유하고, 굼각단은 골짜기 지형이 주위보다 높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교동(龜校洞)를 통합하여 옥곡동이 되고 경산면에 속했다가 경산읍 옥곡동, 옥곡리, 경산시 옥곡동으로 바뀌어 왔다. 옥곡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서부동(西部洞) 관할하에 있다.

 

 

옥곡동 고인돌로 본 경산지역 선사시대

 

 

▲ 옥곡동 청동기시대 유적공원 
 

 

2000, 한국토지주택공사는 295에 이르는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을 위해 경산 서부지구내 문화재 지표조사를 추진하였다. 문화재 조사는 한국문화재재단이 실시하였는데, 조사원들은 조사 구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유적이리라 확신하였다고 한다. 논밭이 넓게 펼쳐진 벌판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고인돌이 한눈에 보기에도 적잖은 크기였던 까닭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결과 서부지구에는 약 67669면적의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 확인되어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을 놀라게 했다. 남천변을 따라 긴 띠 형태로 277동의 집터, 68기의 작업장과 저장 구덩이, 9기의 돌널무덤까지 확인되었다. 현대 택지지구가 들어설 만한 옥곡동 일대가 약 2천여 년 전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옥곡동 고인돌 



당시에 발굴 조사원들을 압도했던 고인돌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도 발견된 그 자리에 보존되고 있다. 경산 옥곡동 청동기시대 유적공원 내 길이 320, 너비 250에 높이는 160에 이르는 무게 5톤 이상의 커다란 바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고인돌 아래에서는 매한가지 돌로 제작한 널이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화살촉과 돌을 갈아서 만든 칼이 함께 묻혀있었다. 돌널 속에 안장된 이는 아마도 용감무쌍한 전사(戰士)였거나 옥곡동 일대를 주름잡던 당대의 호걸(豪傑)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고인돌 부근에는 원래 더 많은 고인돌이 떼를 이루어있었던 것 같다. 발굴조사 당시에도 고인돌 주변으로 돌널무덤이 5기 추가 발견되었는데, 돌널의 제작 방식과 형태 등이 흡사하여 같은 집단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뿐만 아니라 택지지구 전체에서도 4기의 돌널무덤이 더 조사되었으니 최소한 10여 기 넘는 고인돌이 집단적으로 남천변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문화재 조사가 이루어질 당시 옥곡동에는 잘 개간된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다. 워낙 부지런했던 우리 지역 농사꾼들이 생업을 위해 돌들을 깨고 옮기는 등, 땅 위에 드러난 고인돌을 야무지게도 없애버렸으리라. 전국의 숱한 고대 유적들이 모두 겪는 일들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고인돌이라도 워낙 큰 덩치 덕분에 남아있어 준 것이 천운이라 할 만하다.

 

 

▲ 남천면 삼성리 고인돌군 
 

 

대한민국은 전 국토에 약 3만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펼쳐져 있어 가히 고인돌의 나라로 불리기 족하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밀집도인데, 사실은 놀랍게도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가량이 우리 땅에 있다. 경산시에는 그 중 약 253기 정도가 고인돌로 확인되었는데, 이는 전문 연구자들이 공식 보고한 수량일 뿐이다. 최근 수십 년간 이루어진 도시화, 농경지 구획정리 과정에서 숱하게 사라졌을 고인돌까지 고려하면 경산 지역에만 300~400기는 족히 넘는 고인돌이 있지 않았을까. 이는 경상북도 내에서 인근의 청도군과 함께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그만큼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농사짓고 집단을 이루며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는 의미일 터이다. 옥곡동 고인돌처럼 5톤이 훌쩍 넘는 바위를 들어 올려 무덤 위에 안치하고, 기념물을 제작하는 대역사(大役事)는 그야말로 수많은 지역 주민의 힘이 결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상 고인돌 제작은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세리머니에 해당한다. 2천 년 전의 시대에 고인돌을 제작하려면 널을 제작하는 석재 가공업자, 수송업자, 단순 인부 등은 물론 이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관리자, 재정 담당자까지 동원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자(혹은 지배자)의 권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를 검증이라도 하듯 옥곡동 마을 유적에서는 거대한 고인돌과 함께 30여 동의 집터가 함께 모여있는 조직적마을의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30여 가구가 모인 마을이 옥곡동에만 있었을 리 만무한 터, 경산시 일대에는 일찍부터 오목천·남천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짐작된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가능했다니, 옥곡동 일대가 지금 도시민들의 주거지로 각광 받는 것이 우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임진왜란 의병 상천(上川) 정변함(鄭變咸)

 

▲ 옥곡동 삼의정 
 

 

17세기 영남을 대표했던 관료학자 정경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산과 같은 작은 고을의 창의가 여러 고을 중에서도 으뜸이다라고 평가했다. 초계정씨 경산 입향조인 정연(鄭烟) 5대손 정변함의 창의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동산(東山)[경산시 남천면 협석리]에 머물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해 고을이 텅 비자 동생 등과 함께 가동(家?) 및 장정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다. 경산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첫 사례였다. 형제가 고을의 다른 인사들과 망월산(望月山)과 금성산(金城山)에 진을 치니, 왜군들이 함부로 경산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정변함 등은 이후 조정의 명에 따라 의병 부대를 성주 사원(蛇院)으로 옮겼고, 사원전투에서 지인 박응성이 순절하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곽재우 부대에 종군하였다. 1596년에는 팔공산회맹에 참여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의 군공을 인정해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사우(士友)들과 함께 고산서당 건립에 참여하는 등 향촌에서 학문 활동에 매진했다. 송시열의 10대손 송증헌(宋曾憲)이 이들 형제의 임진왜란 행적을 정씨삼의사전(鄭氏三義士傳)으로 남겼다. 해방 후인 1947년 후손들은 선조 정변함을 추모하기 위해 삼의정(三義亭)을 건립하였다.

 

경산의 마지막 선비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선생(1877~1952)

 

▲ 옥곡동 우경재 시비 

 

 

정기연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개인적으로는 몇 해 전 경산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유교 유적을 조사하면서 이 분을 알게 되었다. 정기연은 조선이 개항한 이듬해인 1877년 옥곡동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족숙 정화술(鄭華述)에게 글을 배웠고, 약관에 족숙의 스승이자 기호학파의 적전인 송병선과 송병순 형제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대전에 거주하던 송병선은 1903년 직접 옥곡동을 방문할 정도로 제자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남달랐다. 송변선 스승은 1905년 을사조약 폐기와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며 국권 강탈에 항의해 음독자살한다. 당시 정기연 역시 스승을 따라 서울에 올라가 을사조약 파기 운동에 동참하며 국권회복 의지를 피력했다. 또 다른 스승 송병순은 경술국치 이후 1912년 일제가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음독자살한다. 정기연은 일제의 국권 피탈이라는 현실 속에서 두 스승을 모두 잃은 셈이다.

 

그가 설립에 참여한 초계정씨 재사인 우경재 앞에는 탁와 정기연 선생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빗돌에는 1910년 망국의 비통한 심정을 읊은 세 편의 시술지삼수(述志三首)가 새겨져 있다.

 

나는 어디로 갈꼬 나는 어디로 갈꼬

한강은 차갑고 해는 이미 기운 가운데

망국의 슬픔 안고 길 가면서 울먹인다

수양산 아니면 나는 어디로 갈꼬

 

누구랑 같이 가리 누구랑 같이 가리

행인을 바라보며 사립문에 기대선다

매화야 국화야 날 따른 지 오래구나

너희를 버리고 누구랑 같이 가리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차라리 홀로 가지 딴마음 없건만

이천만 우리 겨레 왜적에게 시달려도

하늘은 무심하니 어찌하면 좋을까

 

음미할 만한 싯구가 아닐 수 없다. 정기연은 스승의 위정척사의 뜻을 계승하며 옥곡동에 은거하며 평생을 보냈다. 단순히 은거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훼유변설(毁儒辨說), 옥석문답(玉石問答) 등의 산문을 지어 일제에 저항했다. 192246세 때 유림총부에서 강사로 초빙했을 때 정기연이 이를 사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기연은 마지막 유자로서 자기 성찰과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학문에 깊이 침잠하면서 많은 저작들을 남겼다. 오늘날 문집으로 전하는 탁와선생문집이 그것이다. 정기연은 195253일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우경재(寓敬齋)와 삼의정(三義亭)

 

 

▲ 옥곡동 우경재 
 

 

옥곡동 안쪽의 덕등(德嶝) 계곡에는 우경재라는 재실이 서 있다. 우경(寓敬)이란 공경함이 머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학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기문에 밝히고 있다. 우경재는 선조들의 제사 공간인 동시에 교육의 장으로서도 기능한 것이다. 재실의 주인공은 정언후(鄭彦?)[1732~1788]이다. 정언후의 증손자 정동민(鄭東珉)은 덕등 기슭에 재실을 겸해 독서처 한 채 마련이 소원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했다. 이에 그의 장남 정태연(鄭兌淵)이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914년에 완공 뒤 우경재라는 편액을 걸었다. 앞서 소개한 정기연이 바로 정동민의 둘째 아들인데, 그의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의 공간이 바로 우경재였다.

 

▲ 옥곡동 삼의정 전경 
 

 

우경재 지근거리에는 삼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기연이 1948년 만년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선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정자 경내에는 특별한 시를 새긴 비석이 서 있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정기연의 시작(詩作)이다.

 

 

벼슬한 여우가 바다를 건너오니 그 재앙도 함께 이르렀구나

응징할 칼을 품고 망설인 자 얼마던고

한 젊은이가 있어 큰 손을 내뻗쳐 쏘아 죽이니

동녘 하늘에는 쾌재소리 울리고 서쪽 이웃을 감동케 하였도다.

 

 

경산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선현 유적지인 것이다. 지역 학생들의 필수 현장 학습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채광수 영남대학교 교수

사진 : 정명환 작가

 

 

 

<사진 자료>

 

 

▲ 남천면 지석묘 
 

 

▲ 삼성리 고인돌공원 

 

 

▲ 삼성리 고인돌공원 돌 덧널무덤 

 

 

▲ 삼의정 비각 

 

 
 

▲ 청동기유적공원 

 

 
 

▲ 우경재와 비각 




 

 

김진홍 기자(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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