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제를 올리고 배움의 등불을 밝힌 마을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24) - 당곡리

2026-09-11 오전 9:50:39

▲ 진량읍 당곡리 전경 



 

프롤로그

 

진량읍 당곡리는 마을 이름에서부터 오래된 신앙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당골 서쪽 당산과 당등이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고, 마을 앞을 흐르는 당곡천에서는 아이가 오래 살기를 바라며 용왕에게 정성을 드렸다. 자인과 진량, 하양과 경산을 잇는 길목에는 주막이 있어 장사꾼과 길손들이 쉬어갔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교회와 학교가 들어서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글 읽는 자식이나 손자가 없으면서도 마을 아이들의 배움을 위해 큰돈을 내놓은 최치문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당산과 물길, 옛길과 배움의 흔적을 따라 당곡리가 걸어온 시간을 살펴본다.

 

▲ 당곡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당곡리(堂谷里)는 원래 압독국 마진량현 서면 마사리와 가야지리에 속한 각단이었다. 1018년 마진량현이 구사부곡으로 강등되고 경주부 관할로 넘어갔다. 1653년 구사부곡이 자인현 관할로 바뀌면서 자인현 하북면 노적리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자인현 중북면으로 편입되어 자인현 중북면 북칠동 당곡리와 당외리(신기리)로 분리되었다. 이때 동쪽 노적골에 있던 마을은 폐촌되었다.

 

▲ 당곡리 지적도(1912)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되면서 당곡리와 당외리(신기리)는 당곡동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 부군현 통합에 의해 진량면이 생기면서 경산군 진량면 당곡동이 되었다. 1997년 진량면이 진량읍으로 승격하면서 경산시 진량읍 당곡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크게 당곡’, ‘당외’, ‘당앞세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1888년에는 당곡과 당외를 합하여 33가구가 살았다.

 

▲ 당곡 안마실 

 

당곡·당골·안마실

마을 서남쪽에는 나지막하고 둥근 산이 있다. 18세기 이 산 뒤에 신당을 짓고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 옆의 골짜기를 당골이라 불렀다. 19세기 중엽 이 당골에 있던 촌락이 정식 마을로 승격되면서 당곡리(堂谷里)’라 하였다. 또 안쪽에 있다고 하여 안마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1911년 당시 24가구가 살았다.

 

▲ 당곡 배끝마을 
 

새태(신기당외·배끝마을

새태는 당골 남쪽에 새로 터를 닦아 새태또는 신기라 불렀다. 마을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엽 형성되어 정식 마을 신기리(新基里)’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노적리가 폐촌되면서 신기리는 당외리(堂外里)’가 되었다. 또 당골 바깥에 있다고 하여 배끝마을(바깥마을)’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공장이 들어서 몇몇 가구만 남아 있다. 1911년 당시 21가구가 살았다.

 

▲ 당앞마을 

 

당앞·당옆

당앞또는 당옆은 사당이 있던 당등이앞 또는 옆에 있는 마을이다. 가야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이곳에는 1960년대까지 당곡주막이 있었다. 이후 점차 가구가 늘어나 한때 9가구 정도가 살았으며, 현재는 식당과 마트, 공장 등이 들어서 있다.

 

▲ 당곡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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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등이 

 

당곡리는 진량의 토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당골 동북쪽에 지형이 말 안장처럼 생긴 안장배기’, 당골 동남쪽에 지형이 뱀처럼 생긴 사산[배밋갓]’, 당산제를 지내던 당골 서남쪽의 당등이[댕댕이]’ 등이 있다.

 

▲ 안골짝 

 

골짜기로는 배밋갓 북쪽에 벼락을 맞았다는 바위 더미가 있는 배락디미’, 당골 동북쪽 안에 있는 안골짝’, 당골 서북쪽에 장승이 서 있었다는 장승배기’, 적지못 안에 있는 적지못안골등이 있다. 특히 적제지가 있는 골짜기는 붉은 흙이 많아 붉당골이라고도 한다.

 

▲ 적지못밑들 

 

대표적인 논과 들판으로는 새태 뒤에 있는 새태뒷들’, 당골 남쪽에 자인 일언리 사람들이 주로 경작하던 이른들’, 적지못 밑에 있는 적지못밑들[적제야]’, 이른들 북쪽에 길게 생긴 논인 진배미등이 있다.

 

▲ 은고개


당골 남쪽에서 자인면 일언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은고개또는 인현(人峴)’이라 불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886년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굶어 죽은 사람들의 묘가 이 고개 주변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은고개에는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기근의 아픈 기억이 지명과 함께 전하고 있다.

 

▲ 당곡천 
 

또 당곡리 앞을 흐르는 개천은 현재는 가야천이라 하지만, 예전에는 당곡계(堂谷溪)’ 또는 당곡천이라 하였다.

 

저수지와 보

 

▲ 적제지 

 

당곡리에는 적제지(적지)’, ‘사산지’, ‘비개미못등의 저수지가 있다. 적제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적화이제(赤火伊堤)’라 등재되어 있어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이곳은 토질이 붉어 붉벌이라 하였는데, 여기에 있는 저수지라서 이두문 적화이(赤火伊)’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곳에는 붉당골또는 불당골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이후 적화이제는 적제로도 불리다가 현재는 적제지라 한다. 당골 서북쪽 등성이 건너편에 있다.

 

▲ 치척동제(사산지)

 

치척동제(侈尺洞堤)’는 사산 아래 치척골에 있었다. ‘치척치자를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이 저수지는 여지도서에 등재되어 있어 18세기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이 저수지 서쪽 86번지 일대 논을 저수지에 편입시켜 확장한 뒤 사산지라 부르면서 치척동제라는 옛 이름은 점차 사라졌다.

 

▲ 비개미못 

 

이외에도 일제시대 이후 축조된 해남못비개미못등이 있었다. 해남못은 새태 남쪽에 있었으며 못 옆에는 회나무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해남못은 매립되었다. 비개미못은 당골 동북쪽에 있으며, 모양이 베틀의 비개미[비경이]처럼 생겨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 새보 

 

당곡의 농경에는 저수지뿐 아니라 보와 도랑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골 서남쪽에는 새로 만든 새보가 있었고, 배락디미 남쪽에는 새보 다음에 만들어졌다는 신영보가 있었다. 또 당골 동남쪽 이른들에는 이른봇도랑을 내어 논에 물을 댔다. 이러한 보와 도랑은 당곡천의 물을 들판으로 끌어들여 농사를 짓는 데 중요한 수리시설이었다.

 

당곡주막

 

▲ 당곡주막터와 양양제 

 

당곡리 460번지 일대 못 둑 옆에는 1960년대까지 당곡주막이 있었다. 이곳은 자인에서 진량을 거쳐 하양장으로 가는 길목인 동시에 광석리에서 가야리를 거쳐 경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오가는 길손이나 장사꾼들이 많이 쉬어갔다. 한때 포항에서 올라온 어물이 이곳을 지나 대구로 들어가면서 주막 주변이 늘 붐볐다고 한다. 지금은 주막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슈퍼마켓이 들어서 있다.

 

 

삶의 흔적

 

당산제와 용왕제

 

▲ 당산(당등이)

 

당곡리 서남쪽에는 당산(당등이)’이라 부르는 작은 산이 있다. 이 산은 둥글고 나지막한 형태를 하고 있어 선화리·내리·압량리의 두락산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 때문에 압독국 시기 군사 훈련이나 주둔과 관련된 공간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 당산 평면 사진(구글)

 

18세기에는 이 산 뒤에 신당을 지어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1785년 자인현감 정충언이 각 면에 한장군사당을 하나씩 짓고 한장군과 누이를 숭상하라는 명을 내린 바 있다. 그래서 이 신당은 자인의 수호신인 한장군과 누이를 모신 중북면의 한장군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당이 세워진 뒤부터 산을 당등이[댕댕이]’라 불렀고, 서남쪽에 있는 양양제는 당장지(堂場池)’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약 150여 년 전 경주이씨 문중에서 이 신당을 없앴다고 한다. 당곡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처럼 당산제가 이루어지던 골짜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한다.

 

▲ 당나무 

 

한편, 당곡리 172-1번지 당곡천 가에 있는 당나무에서는 예전부터 용왕제를 지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정월 보름에 점쟁이에게 가서 아이의 수명을 물었는데, “아이의 목숨이 길지 않으니 용왕을 먹여주라.”라는 말을 들으면 아이를 당곡천이나 큰 웅덩이 또는 저수지로 데리고 가 절을 하게 하였다. 이때 할머니나 어머니는 쌀을 물에 뿌리면서 아이가 오래 살기를 기원하였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장수한다고 믿었다. 당곡리에서 행하던 당산제와 용왕제는 현재 모두 사라졌다.

 

당곡교회와 숭덕학교

 

▲ 당곡교회 터 

 

당곡리에는 대한제국 말기에 교회도 세워졌다. 1909년경 미국인 선교사 맹의와(孟義窩, Edwin Frost McFarland)가 당곡리 6-5번지에 세웠다. 당시 자인현 당곡에 있어 자인당곡교회(慈仁堂谷敎會)’라 하였다.

 

▲ 덕숭학교 졸업장(1917)

 

또 이 교회 안에는 초등과정의 숭덕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이후 자인읍교회로 옮겨 덕숭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73월 재정난으로 폐교하였으며, 교회도 자인 북사리의 북사교회라 불렸던 자인읍교회와 병합되었다. 1916년 당시 목사는 맹의와였다.

 

도천서원

 

▲ 도천서원 

 

▲ 도천서원 현판 

 

황제1리 진성초등학교에서 당곡리로 가다 보면 도롯가에 서원이 하나 있다. 바로 도천서원(道天書院)이다. 당곡리에 살던 경주이씨 익재파 소경공 문중 이장희가 1946년 세웠다. 이 서원에는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 이청, 익재파 파조 이제현, 이항복, 소경공파 파조 이지회를 추향하고 있다. 문호는 건인문(建仁門), 원호는 도천서원(道天書院), 사당의 문호는 개원문(開元門), 사호는 경덕사(景德祠)이다.

 

▲ 경덕사 

 

▲ 경덕사 현판 

 

이 서원에 배향된 소경공 이지회는 세종 때 낙향하여 경주 가사리에 살다가 만년에 자인 관상리로 이거하였다. 그의 묘는 관상리 염불암에 있는데, 신관리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염불암할배라 부른다. 당곡문중은 관상문중의 큰집 격이다. 이지회의 7세손 이춘암은 임진왜란 때 당숙 이기업 장군과 함께 의병으로 활약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자인향교를 복원하였다. 그의 상소문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어 있다.

 

 

최치문의 삶

 

당곡에는 19세기 말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마을 아이들의 배움을 도운 최치문(崔致文)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름과 당곡에 살았다는 사실 외에 그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18892월 최치문은 돈 400금을 출연하여 당곡서당에서 사용할 등유를 구입할 자본을 마련하고, 훈장에게 품삯을 지급할 자금도 마련하였다. 사람들이 그대는 글을 읽는 자식과 손자가 없거늘 어찌하여 서숙에 정성을 들이는가?”라고 묻자, 그는 근래 관가에서 유학을 숭상하고 문장을 중시하여 백성을 깨우치고 권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하여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배움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답하였다. 자신의 집안에 글을 배우는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뜻을 아름답게 여겨 자인현감 오횡묵에게 보고하였다. 오횡묵은 기이하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감탄하며 유관(儒官)의 소임을 맡겨 퇴락한 풍속을 일으키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의 처지가 미천하다고 하자, 특별히 북면의 풍헌(風憲)으로 임명하고 직접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에 감격한 오횡묵은 장문의 시를 지어 최치문의 선행을 기렸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堂谷一奇事(당곡일기사) 당곡에 기이한 일 하나 있어

尤有別論焉(우유별론언) 더욱 별도로 논의를 하노라.

傾財補里塾(경재보리숙) 재산 내어 마을 서숙 도우려

四百黃金錢(사백황금전) 사백의 황금 돈을 출연하니

黔?新生煖(검돌신생난) 검은 구들 새로 불을 지피고

靑燈始足燃(청등시족연) 푸른 등은 비로소 불을 켜네.

家無挾冊子(가무협책자) 집에 책을 끼는 자제 없지만

文房非所憐(문방비소련) 문방이 가련하지 아니해라.

 

 

에필로그

 

1889년 최치문은 자신의 자손이 아니라 마을 아이들을 위해 돈 400금을 내놓았다. 그 돈으로 훈장의 품삯을 마련하고 등유를 사면서 당곡서당에는 밤에도 글을 읽을 수 있는 불이 켜졌다. 자인현감 오횡묵은 이를 두고 당곡에 기이한 일 하나 있다고 감탄하며, “검은 구들 새로 따뜻해지고 푸른 등은 비로소 불을 켜네라고 노래하였다.

 

오늘날 당곡서당도, 길손들로 붐비던 주막도 사라졌다. 당산제와 용왕제를 지내던 풍습 역시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당등이와 안골짝, 장승배기, 은고개 같은 옛 지명에는 마을 사람들이 살아온 기억이 남아 있고, 최치문이 밝혔던 서당의 등불에는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았던 한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다. 시대와 생활은 달라졌지만, 공동체의 안녕을 빌고 아이들의 앞날을 생각했던 마음은 오늘의 당곡리에도 오래 기억될 이야기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당곡리 마을 전경 
 
▲ 당곡리 
 
▲ 당곡리 
 
▲ 당곡리 
 
▲ 당곡리 마을 전경 
 
▲ 당곡리 회관 
 
▲ 당등이
 
▲ 안장배기산
 
▲ 진배미들
 
▲ 적지못밑들
 
▲ 적지못안골
 
▲ 배끝마을
 
▲ 새보 
 
▲ 당곡천
 
▲ 담양지
 
▲ 사산지 
 
▲ 적제지
 
▲ 당나무
 
▲ 당나무 밑 표지석
 
▲ 도천서원 
 
▲ 도천서원
 
▲ 경덕사
 
▲ 도천서원과 경덕사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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