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7 오전 10:39:34

▲ 진량읍 안촌리 마을 전경
◆ 프롤로그
옛말에 거지 삼대, 부자 삼대가 없다고 했다. 재산도 오래 지키기 어렵지만, 가문을 이어 인물과 학문까지 함께 번성시키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데 옛 자인현 안촌리에는 아들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이라 불릴 만큼 인물과 학문, 재산을 함께 이룬 집안이 있었다.

▲ 안촌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안촌리는 조선 초기까지 경주부 자인현 북면 성언리(成彦里)에 속한 각단이었다.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자인현 북면 안촌리로 바뀌었다. 1653년 구사부곡이 자인에 편입될 때 기존의 자인현 북면은 상북면으로 편성되었는데, 안촌리만 하북면으로 편입되었다. 18세기 행정구역 명칭 개편 때 하북면은 북칠동∼북종동까지 4개 동으로 나뉘고, 안촌리는 죽원곡리(대원리), 속초리, 신제내리(신제리) 등과 함께 북팔동에 속하였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하북면이 중북면과 하북면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중북면 안촌동이 되었다. 1914년 부군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진량면 안촌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진량면 안촌동이라 하다가 1988년 안촌리, 1997년 진량읍 안촌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안촌 하나의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 고속철로가 마을 가운데로 개설되면서 안촌은 폐촌되어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몇몇 가구만 북쪽으로 옮겨 새 마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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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촌리 지적도(1912)
▲ 성언리·안촌리

▲ 안촌리 마을 터
조선 초기까지 성언리는 지금의 자인 남촌·단북·계림·일언리, 진량 안촌리 등을 아우르는 행정단위였다.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성언리는 없어지고 각단으로 있던 마을들이 정식 마을로 승격되었다. 성언리(成彦里)의 흔적은 현재 일언리(日彦里)로 남아 있다. 이 성언리에 속한 각단 안촌은 성언리 중에서도 안쪽에 있다고 하여 ‘안촌’이라 하였는데, ‘기러기 안’을 써서 안촌(雁村)으로 기록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한자를 기반으로 하여 마을의 형상이 기러기를 닮았다는 어원설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 일설에는 김해김씨 안경공파 김은국과 김언국 형제가 각각 노적리(현 황제리)와 성언리(현 안촌리)에 이거했는데, 아우 김언국이 사는 마을이라서 형제를 가리키는 ‘안항(雁行)’에서 ‘안’을 따 안촌이라 했다고도 한다.

▲ 안촌리 전경
이 마을은 17세기 김해김씨 김언국(金彦國)과 밀양박씨가 처음 개척했다고 전하지만,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이 마을의 저수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5세기 전부터 이미 사람이 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안촌이란 마을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호구총수』이다. 1888년에는 34호가 살았고, 리정은 박정헌(朴廷憲)이었다. 1911년에는 52가구로 늘어났다.

▲ 안촌리 지명 지도
◆ 삶의 터전
▲ 산·골·재

▲ 도천산
도천산 북쪽으로 3개의 능선이 뻗어 두 개의 큰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안촌리는 도천산 서북쪽 골짜기 효곡(孝谷)에 자리한 마을이다. 속초리와는 등성이 하나로 구분된다. 그래서 옛날부터 산과 골짜기, 고개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남쪽 자인의 주산인 도천산이다. 도천산은 남쪽에서 보면 높은 봉우리 있는 곳이 사람의 얼굴에 해당하고, 속초, 안촌으로 뻗어나간 능선이 세 갈래로 뻗어 마치 사람이 화관을 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 안촌을 가로지르는 고속철도
그런데 고속철로 공사로 인해 두 갈래가 잘려 나갔다. 또 도천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능선은 뱀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산 또는 배밋갓[뱀의 갓]이라 부른다. 배밋갓을 일언에서는 배밋장이라 한다.

▲ 넙득등
등성이로는 큰왕골 서남쪽 넓적하다고 하여 넙덕등, 큰왕골 동쪽 당집 위에 있다고 하여 당등, 절골과 큰왕골 사이에 있는 막등, 절골 서쪽 지형이 사람의 볼기 형국이라는 볼깃등 등이 있다.

▲ 가뭇고개
고개로는 자인 단북리의 단산동 가못[부제]으로 넘어가는 가뭇고개, 자인 일언리로 넘어가는 소막고개, 자인 계림리로 넘어가는 계림고개[울명고개]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골골짜기마다 공장이 들어서면서 고개라는 느낌이 없다.

▲ 절골
골짜기로는 안촌 남쪽 단산동(현 단북리) 부제지로 넘어가는 가뭇골, 남쪽의 큰왕골[대왕골], 큰왕골 남쪽 절이 있었다는 절골(절골새), 안촌 서쪽 가에 있다고 하여 갓골, 동남쪽 시싯골과 마을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윗골, 안촌 동쪽 큰 골짜기인 큰골 등이 있지만, 지금은 일부 주민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
▲ 논·들

▲ 강남봇들
안촌의 논과 들은 속초리처럼 북서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안촌 서쪽 강남보의 물을 대던 강남봇들, 강남봇들 남쪽 돌이 박혀 있다고 하여 돌배기, 안촌 북쪽 속초리 눗보의 물을 대던 눗봇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1970년대 경지정리로 인하여 지형이 바뀌어 지금은 잊혀졌다.

▲ 효막지
▲ 효자의 전설이 서린 효막지
안촌리에는 조선시대부터 효막지[소막제], 웃골못, 앞못, 갓골못 등 크고 작은 저수지 4개가 있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등재된 소막제(小幕堤)다. 크기는 관개 5결로 비교적 작았다. 그러다가 『여지도서(1765)』에서 소마제(小馬堤)로 바뀌었고, 현재 효막지(孝幕池)라 한다. 조선시대까지 203번지 일대에 있었는데, 일제시대 이후 북쪽 218번지와 204번지를 편입하여 현재의 크기가 되었다.

▲ 효막지
이 저수지가 효막지라 부르게 된 사연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옛날 어느 효자가 어버이상을 당하자 이곳에 작은 막을 치고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 후 그곳에 둑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작은 막이 있던 곳이라서 ‘소막제’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이곳에 대대로 효자가 많아서 ‘소’를 ‘효’로 바꾸어 효막지라고 불렀다. 이 효막지를 효담(孝潭)이라고도 한다.
▲ 지당
이외 47번지의 웅덩이 같은 지당(池塘)은 아직 있으며, 웃골 175번지에 있던 웃골못, 마을 앞 163번지에 있던 앞못, 마을 서쪽 291번지에 있던 갓골못은 현재 매립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삶의 흔적
▲ 고고학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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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집터(성림문화재연구원)
고속철로 공사로 인하여 2차례 고고학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제1차 조사는 안촌리 마을 터 서쪽 구릉이었다. 여기서 청동기시대 도랑 유적, 삼국시대 집터, 조선시대 생활 유적 등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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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 시대 무문토기(성림문화재연구원)
제2차 조사는 1차 조사 장소에서 남서쪽 일대 구릉이었다. 이곳에서는 청동시대 무문토기와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토기편과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안촌리 일대는 멀리는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부터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 증명되었다. 특히,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집터는 마진량현의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 울명고개
▲ 울명고개 전설
안촌리에는 ‘울명고개 전설’이 있다. 울명고개는 현재 계림고개로 바뀌었다. 안촌에서 계림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소막지 옆으로 난 고갯길이다.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 있고, 고갯길을 가다 보면 진량 자인 간 새로 난 도로가 가로막고 있다. 전설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조선 선조 때 삼 남매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은 집을 떠나 의병으로 갔고, 남은 아내는 삼 남매를 키우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왜군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어쩔 수 없이 여인은 어린 삼 남매를 데리고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다. 셋 중 한 명은 업고, 한 명은 안고, 나머지 한 명은 걷게 하여 길을 가다가 고개에 다다랐다. 왜군은 바짝 뒤따르는데 걸어가는 딸자식 때문에 더 이상 빨리 도망갈 수가 없었다. 여인은 하는 수 없이 걸어가는 딸을 버려두고 도망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딸이 눈치를 채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았다. 다급한 어머니는 딸이 잡고 있던 치마를 벗어버리고 가 버렸다. 그 후 딸은 어머니의 치마를 안고 하염없이 울다 지쳐 결국에는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고개를 ‘울명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초행과 신행 가마는 이 고개를 넘지 않고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경산문화유적총람(1996)』)

▲ 울명고개
이 전설은 임진왜란 당시 피란 관련 이야기인데, 실제로 당시 안촌리와 대원리, 신제리 등은 많은 사람이 타지에서 피란 와서 정착한 마을이다. 이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당시 최문병을 비롯한 자인현 의병들의 활약으로 자인현은 왜군이 침범하지 못한 일종의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양에서 살던 석씨들이 신제리로 왔고, 청주에 살던 밀양박씨들이 대원리로 왔고, 충주에 살던 김해김씨들이 안촌리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처럼 피란 온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서 이러한 전설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 종교적 흔적

▲ 안촌리 당목
이 마을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 자손 번창을 기원한 동제를 최근까지 올렸다. 동제는 안촌리 330번지에 있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에서 진행했다. 이 나무는 마을의 보호수이면서 마을 목(木)이었다. 수령은 약 217년으로 추정한다. 멀리서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두 그루이다. 이 중 한 그루는 할배나무, 다른 한 그루는 할매나무라 불렀다. 원래는 마을 입구였는데 고속철로 공사로 마을이 이전하면서 마을 서쪽이 되었다. 안촌리 동제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나무의 수령으로 보아 200여 년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 안촌리 상엿집 터
또, 조선시대 장례는 매장 풍습이었는데, 시신을 운구하는 상여를 보관하는 상엿집이 마을마다 있었다. 안촌리에도 이러한 상엿집이 속초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다 보니 상엿집의 활용도가 떨어져 사라졌다.

▲ 안촌교회
그리고 1967년 의송교회에서 분립한 안촌교회가 안촌동 66-1번지에 설립되었다. 초대 이강응 전도사부터 현재 허정문 목사까지 15명의 교역자가 활동하고 있다.
◆ 아들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의 김해김씨 삶의 흔적
이러한 마을에 아들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 등 일명 삼천석 부자로 불린 김해김씨가 아흔아홉 칸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과장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과거 이 마을에 김해김씨 재실이 3개나 있었고, 일제시대 이 문중 사람이 자인과 진량 등지에서 재력과 학식 등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로 보아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김해김씨는 승정원 승지를 지낸 정란공신(靖難功臣) 한동(漢東) 김세준(金世準)의 증손자인 김은국(金殷國)과 안포(雁圃) 김언국(金彦國)이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자인현 황제와 안촌에 들어와 살면서 세계가 번성하였다. 안촌리 입향조는 김언국이다. 김언국의 후손들은 이곳에 살면서 익양재, 죽곡재, 천산재 등 3개의 재실을 짓고 대대로 조상 숭배와 효를 실천하면서 살았다. 그 김해김씨 재실의 흔적을 살펴보자.
▲ 익양재
익양재(翼陽齋)는 김해김씨 안촌리 입향조 김언국의 서실이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전하지 않은데, 조선 후기 서원 철폐령 때 폐철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당시에도 없다고 하였다.
▲죽곡재
죽곡재(竹谷齋)는 김덕번(金德蕃)의 묘사재이다. 그는 자는 연집(連執), 호(號)는 죽곡(竹谷), 진사(進士) 김언국(金彦國)의 아들이다. 1892년 김현섭이 김해김씨 묘사재를 겸한 서당으로 지었다. 당시 현감이었던 이만윤이 춘전농수(春田農?)라는 글을 써 주었다고 한다. 1933년 당시 있었는데, 언제 폐철되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 천산재
천산재(天山齋)는 김현섭(金顯燮)의 강학소였다. 그는 자(字)는 달서(達瑞), 호(號)는 춘전(春田), 김언국의 9세손이다. 1904년(갑진년) 김해 수로왕릉 내 숭선전(崇善殿) 참봉(參奉)을 하였다. 아들 김홍배가 부친의 강학소를 묘사재로 꾸미고, ‘천산재기(天山齋記)’ 기문을 벽진인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 1860∼1944)에 부탁하여 걸어놓았다. 천산은 도천산에서 따왔다.
▲ 김홍배
김홍배(金弘培, 1877∼?)는 자(字)는 자굉(子宏)이다. 그는 품성이 베풀기를 좋아 했다. 1922년 자인향교 교장으로서 칠백 원을 희사하여 명륜당 중수, 문루와 포사를 중건하였고, 1923년 관란서원을 중건하였다. 또 이천 원을 기부하여 진량공립보통학교 창건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삼천삼백 원을 부담하여 진량 경찰관주재소를 창건하는 등 진량의 유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조곡리 탐진안씨 송암정의 「송암정상량문」과 용성 매남 장재동의 월성박씨 재실 운재정(雲齋亭)의 기문, 남산면 송내동 이로재의 양송(樑頌) 등을 쓰는 등 경제력과 학식으로 이름을 날렸다.
◆ 에필로그
현재 안촌리는 새로 조성된 곳이다. 기존에 살던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몇몇 가구만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에 따라 안촌리에 있던 김해김씨 문중의 흔적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아들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이라 부르던 삼천석 부잣집 이야기 또한 고속철로 밑으로 묻혀버렸다. 비록 고래등 같은 집과 삼천석 부자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후손을 기르고 학문을 이어 지역사회를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었던 정신만큼은 지금도 자인과 진량 곳곳에 남아 있다. 안촌리는 사라졌지만, 사람을 키우고 마을을 일으킨 그 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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