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가 무학농장 개간에 참여한 사연

가난한 이웃을 위한 헌신과 희생 기억해야...

2024-10-29 오후 3:33:45

하양성당 고 이임춘 신부는 1960년경부터 지역민들의 굶주림과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무학산 개간을 염두에 두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 거대한 사업을 추진할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맨손으로 일군 23만평 무학농장 전경



노심초사하던 이 신부는 1964년 봄 어느날 가톨릭여자기술학원에 필요한 쌀을 사러 오던 수지 여사(Susannah Mary Younger, 한국명 양수산나, 이하 수지 여사라 칭함) 에게 무학산을 개간해 목장을 만들어 가난한 지역민들을 구하고 기술학원의 경제적 자립도 이루자며 개간 동참과 노동자들의 임금 지불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가톨릭구호서비스 기구로부터 원조 밀가루를 배분받아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수지 여사는 가톨릭구호서비스 기구 대표와 친구였다. 이 신부의 제안을 받아들인 수지 여사가 가톨릭구호서비스 기구 대표로부터 원조 밀가루 제공 동의를 받아 내자, 가톨릭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도 무학농장 개간 프로젝트 추진을 승인했다.

 

수지 여사가 확보한 원조 밀가루는 무학농장 개간 원동력이 됐다.

 

수지 여사는 무학농장 개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를 그녀가 1967년 영국 등 외국의 후원자들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저술한 책 NEVER ENDING FLOWER(무궁화)에 자세하게 기술했다.

 

미국 출판본(왼쪽) 영국 출판본(오른쪽)

 

 

수지 여사가 쌀 구매를 위해 이 신부를 3번째 만난 날, 이 신부가 털어놓은 무학농장 개발 구상과 수지 여사의 참여 결정과 무학농장 개간 시작, 그 감동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쌀 가격이 약간 오른 것에 내가 움찔한 것을 그가 알아차리고 내게 물었다.

 

집안 한가득 있는 원생들을 먹이는 게 많이 어렵죠? 수지 당신 한 명이 계속 지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국 후원자들이 얼마나 보낼지, 언제 보낼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한국 내에서 소득 창출을 해야 외부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한국에서 돈 벌기가 쉽지 않아요. 그리고 후원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려면 수입이 실제로 마련될 것이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가톨릭여자기술학원의 자립과 동시에 굶주린 이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톨릭교회가 가장 가난한 농민들의 곤경에 얼마나 같이 고뇌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저는 건설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관심 있어요?”

 

이 신부님은 매우 똑똑하시기에 그분의 생각을 충분히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나는 관심이 많다고 대답했고 그는 몇 달 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양성당 언덕 뒤로 2마일(3km) 떨어진 곳에 잘 보존된 비옥한 산비탈 땅이 있습니다. 경작을 할 만한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모자라 그 땅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도로를 내고 땅을 잘 경운하고 비료도 준다면 쌀 빼고 어떠한 작물도 잘 자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이 나라는 산이 너무 많아 23%의 땅 밖에 경작을 못 하고 있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땅을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농촌의 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자리 창출과 소득을 제고 할 목축업을 발전시키고, 그리하면 영양 수준도 높일 수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농사만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그 부지가 목초지로도 이상적이라 했으며 한국 정부도 낙농업을 진흥시키려 애쓴다고 했다.

 

유제품 시장이 성장하고 있지만, 사료 가격의 변동이 심해서 성공할 만한 규모로 낙농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비탈을 낙농장으로 바꾸고 자가 사료를 재배하고 유기질 비료와 부수입을 얻기 위해 돼지를 기르면 돈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부들이 가축을 기르는 훈련도 받아 결국 자기 가축을 기르는 기회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우리와 함께 일을 해 줄 필요한 기술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다며 하양성당에서 약간의 돈을 각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가톨릭 구호서비스기구가 노동자들의 임금 지불을 위해 미국의 원조 밀가루를 우리에게 배분해준다면, 그 일부는 나중에 땅과 송아지, 돼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해외로부터 나머지 재원을 마련하면 농촌 개발 원조 프로젝트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며 오늘날 일거리 부족으로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것으로 이 신부님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 신부님이 나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고, 오래지 않아 농공학에 많은 경험이 있는 옛 친구, 박 씨에게 계획의 초안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초안이 끝나자마자 나는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원조 밀가루를 제공해줄 가톨릭 구호서비스기구 대표의 동의를 받아냈다. 이 핵심 지원 확인이 들어간 계획을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에게 보여 드렸다.
 

대주교님은 농촌 출신이라 신중하고 실용적인 농업 관련 지혜를 가지고 계신다. 성공에 대한 강한 확신이 그에게 없었더라면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허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대주교는 직접 산에 올라 부지를 보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며칠 후 대주교님, 이 신부님, 박 씨, 그리고 나는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 농장부지로 길을 나섰다. 우리는 숨을 고룬 첫 번째 장소에서 대구까지 뻗어 흐르는 드넓은 금호강 유역과 하양의 넓은 과수원,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무학산의 멋진 경치를 감상했다. 고도가 겨우 600m밖에 되지 않기에 산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약 한 시간 정도 걸려 농장부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숨이 꽤 가빴다. 무학산 뒤로는 팔공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산기슭에 불과한 무학산도 여전히 호랑이와 늑대의 서식지이다.
 

이 신부님이 계획한 농장은 언덕의 어깨춤에 의해 가려진 약간 움푹 들어간 곳에 있다. 더 넓은 부분은 남쪽을 향해 있다. 오솔길을 따라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수량은 넉넉해 보였다. 대주교님는 흙 한 움큼을 퍼서 손가락 사이로 문지르고, 남은 얼룩을 체크하는 등 도시에서 온 이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여러 행동을 했다. 대주교님은 자세를 펴고는 활짝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주 좋아’ 200에이커의 부지를 한 시간 동안 터벅터벅 걸어 흙과 샘물을 체크 후 무학 시범농장은 대주교님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신부님이 열정을 보이니 대주교님은 조치를 즉각 취하셨다. 큰 재정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으로 땅을 샀다. 나머지는 지방정부가 개발권을 인가해 주었고,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우리에게 유상 인도해 주었다. 가톨릭 구호 서비스 기구는 첫 번째 원조 밀가루를 보내 주었고, 수백 명의 일 없는 농촌 노동자들이 배수로를 파고 돌을 깔기 시작했다. 이어 몇 필지의 밭을 처음으로 개간하고 돌을 제거하고, 첫 실험 작물로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다. 이 신부님과 나는 수중에 있는 전액을 프로젝트에 쏟아부었고, 생각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NEVER ENDING FLOWERCows on the Tiger Trail 편 중에서 (번역 : 이정혜)

 

수지 여사는 누구

 

수지 여사(1965년 무학농장, 2023년 사도직협조자양성센터)



 

수지 여사는 스코틀랜드의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는 영국 노동당 의원, 외무부 차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왕족(스튜어트 지파)의 후손이다. 외삼촌과 사촌오빠 2명이 6.25 전쟁에 참전했다. 수지 여사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1957년에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리스도의 생애><성경>을 읽은 뒤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가난한 곳에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선교사도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이 움튼 한국교회에서 일하기 위해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으로 195912, 23세의 나이로 한국 땅을 밟았다.

 

효성여대에 피아노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피아노 7대를 모아 2개월의 항해 끝에 한국에 온 그녀는 효성여대에서 영어와 불어 교수로 일하면서 삼덕성당 옆에 방 3개짜리 집을 한 채 사서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 버려진 고아들을 돌보는 가톨릭 근로소년원을 시작했고, 불우한 여자 아이들에게 양재와 미용 등의 기술을 가르쳐 자립의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가톨릭여자기술학원(현 가톨릭푸름터)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무학농장 개간 참여 이후 루르드의 사도직협조자(Auxilista, 세상 안에 살면서 특정 교구에 소속돼 그 교구와 주교의 사목활동에 협조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봉사하는 성소) 양성센터에서 한국의 모든 교구에서 주교님들이 보낸 협조자와 후보자들을 돕는 일을 했다. 일생을 한국의 불우한 이웃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 선교 봉사 활동으로 사시다 2024910일 향년 88세로 선종했다. 가톨릭 군위묘원에 모셨다.









 

 

 

편집자주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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