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오후 5:28:56
경산묘목 리브랜드를 위한 스토리를 찾아서
.png)
오늘날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은 브랜드를 구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브랜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기업의 생존을 기대하기 어렵다.
경산에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경산 묘목이 있다. 경산의 토산물 중 전국 시장점유율 60% 이상으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유일한 품목이다. 대한민국 과수산업의 뿌리로 경산의 자랑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 묘목산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경쟁이 시작되었다.
경산묘목을 식별시키고 경쟁지역 묘목과 차별화를 위해서는 경산묘목 브랜드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경쟁제품과 차별화의 핵심은 브랜드이다. 제품과 서비스에 서사를 부여하고 더 특별하고 더 새로운 가치를 심는 것이 브랜드 스토리이다.
소비자에게 울림을 주는 스토리가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이다.
100년 역사 경산묘목 정체성이 담긴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앞으로 경산묘목 브랜드 스토리가 집대성되고, 경산묘목이 매력적인 브랜드로 재탄생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100년 역사 경산묘목의 태동과 발전
경산 묘목의 태동은 1905년경 조선 이주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4년에 편찬된 「최신 조선 이주 안내」는 금호평야 일대를 ‘조선의 국부(國富)를 위한 보고(寶庫)’라고 평가했다. 경산 지역, 특히 금호강 유역이 일본인들에게 비옥한 농경지로 각광받아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무렵 일본인 가케야마 히데끼(影山秀樹)는 금호강 일대에서 사과 및 포도 시험 재배에 성공했다. 경산묘목의 모태로 이야기 된다.
1910년 무렵에는 고바야시 도쿠지로(小林德次郞)가 하양읍 대조리(버티미)에 정착하여 최초로 뽕나무 육묘를 시작하여 접목 및 재배기술를 한국인들에게 전수했다. 새로운 농사법으로 뽕나무와 과수를 재배하였다. 경산 묘목 산업의 시작으로 본다.
.png)
▲고바야시 도쿠지로(小林德次郞)가 하양읍 대조리(버티미12길 58-13)에 정착하여 거주한 일본식 가옥, 경산묘목 100년 역사의 중요 유형자산이 방치·훼손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시노하라 마사이찌(篠原宮市)는 상업적 육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한국인 책임자 송기출, 원남조, 백석근에게 접목 및 재배 기술을 전수하고, 사과, 복숭아, 자두 등 유실수 중심에서 가로수, 조경수, 산림수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png)
▲시노하라 마사이찌(篠原宮市) 가옥(하양읍 대부길 29-4)
이 시기 경산 묘목은 기후, 토질 등을 기반으로 대규모 상업적 육묘사업을 발전시켜 한반도 전체와 만주 일대까지 사업 규모를 확장했다. 이로써 경산 묘목은 한국 종묘산업의 원산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일본인들로부터 근대적 육묘 기술을 습득하여 1930년대부터 독자적으로 묘목을 재배하여 판매하던 경산묘목은 1960년대에 들어 산림법·농산종묘법 제정, 잠업증산 5개년 계획, 치산녹화 7개년 계획, 수계별 산림복구 종합계획, 1967년 일본에서 후지(富士) 사과 도입, 1968년 경상북도 지정 육묘장 운영 등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전국 최대, 최고 육묘 기술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한국 과수 산업의 근간이 되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2007년 4월 20일 하양읍 환상리·대조리와 진량읍 보인리 일원 415㏊를 ‘경산종묘산업특구’로 지정(지식경제부 고시 제2007-20호)하여 경산 종묘산업이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되고 있다, 아울러 경산 종묘클러스터사업 운영(2008~ ), 경산종묘기술센터 설립과 시험포장 운영, 경산묘목조합 설립, 경산종묘유통센터 구축 등으로 우량건전 묘목, 무병묘 생산 보급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미래 과수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png)
▲경산종묘산업특구 위치도
현재, 경산은 전국 과수묘목 생산의 60% 이상, 무병묘 생산의 60%, 장미 묘목의 80%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대한민국 과수 묘목의 메카이다.
“천혜의 사질양토 전국 과수인들이 부러워한다”

대조리에서 오랫동안 묘목농사를 해온 원규택 어르신(우측 사진)은 경산묘목에 대한 유래와 역사를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묘목을 처음 시작한 일본인 시나노 등 3인은 재배 적지를 찾아 전국을 다 다녔는데 여기에 정착했어. 왜냐하면 여기는 사질양토라 묘목이나 과수가 잘 되는 토양이야. 사질토로 옥토가 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거든. 금호강 물길이 옛날에는 여기(대조, 환상리)로 흘렀어. 그러다 문천지 아래 보를 막아 물길이 부호동 쪽으로 바뀌었지. 그리고 제방을 쌓으니 강 퇴적층이 사질양토의 옥토가 된거지.
서울이든 전라도 쪽이든 묘목을 사러 오면, 우리 동네 땅을 그렇게 탐낸다.
제일 처음에는 상묘(뽕나무)로 시작했지. 오리나무, 꿀밤나무 등 산림녹화수도 많았지만 전국 상묘는 거의 다 여기 묘목으로 했다고 봐야지. 업체 한 군데 당 30만~40만 그루씩 했지. 그다음이 장미였고. 장미는 지금도 전국 80%쯤 된다고 봐야지.
접목하는 것은 거의 여기가 본거지야. 옛날에는 비닐도 없어서, 볏짚 쓰고 ... 접목하는 방법이 늘어나면서 밤나무 접목도 많이 했지. 1년에 약 40만 그루씩 될걸. 어디서 제대로 배우고 그런 건 아니고, 알음알음 접목 배우고 그랬어.
마을 전체를 돌아봐도 무슨 교육을 제대로 받고 그런 건 없어. 요즘 들어서 무슨 자격증 따고, 교육받고 하지만 ... 지금이야 2세대, 3세대로 넘어왔으니까.
옛날에 접하는 거 배울 때, 제대로 배운 건 아니야.
접하는 칼이 너무 날카로워서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게 했지. 어깨 너머로 보다가 몰래 몰래 해보고, 어디 다른데 가서 해보고 했지. 다 눈대중으로 배웠다고 봐야지. 우리 웃어른들 쯤 되어야 일본인들한테 배우고. 그분들은 다 고인 됐어. 접붙이는 기술이 좋아졌을 때는 20~30명씩 모여서 40여 일 정도 배우고 오기도 했어.
박정희 대통령 때 이 동네 묘목이 전국 최고가 되었다고 봐야 해. 뽕나무 접 붙이고, 탱자 묘목 농사도 많이 했다. 8월쯤 되면 전국에서 나무 사러 많이 몰려 왔지. 보따리 장수들도 몰려들고,”
최상룡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