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8 오전 8:36:26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는 모습
신라에서는 國家鎭護(국가진호 : 국가와 백성을 외적이나 재난으로부터 보호함)를 위해 위대한 승려 100분을 高座(고좌)에 모시고 100일 동안 법회를 행하는 백고좌법회를 개최한다.
국가진호를 위한 백고좌법회가 열렸으나, 원효는 행동이 광인과 같다고 하여 원효를 초대하지 않은 채 법회를 열었다.
▲ 원효 없는 백고좌법회 장면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고 『인왕경(仁王經)』대회를 열고 난 얼마 뒤 문무대왕비가 병을 앓는데 약효가 없었을 뿐 아니라 왕자와 신하들이 모든 산천 영사(靈祠)에 기도를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 문무대왕비가 쓰러진 모습
그때 어느 무당이 타국으로 사람을 보내 약을 구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므로 칙사를 당나라로 보낸다. 특명을 받은 칙사가 큰 배를 타고 당으로 향하는 길에 용왕의 사자를 만나 용궁으로 가서 黔海大龍王(금해대용왕)을 만나 경전을 받아온다.
▲ 용궁에서 경전을 받음
용왕은 특사에게 순서가 뒤바뀐 30장 가량의 종이뭉치를 건네며 대안성자(大安聖者)를 시켜 흩어진 종이의 차례를 맞추고 원효에게 청하여 소(疏 : 해설서)를 짓게 하면 왕비의 병이 틀림없이 나을 거라고 한다.
사신의 말을 들은 왕은 시정을 무대로 활동하던 대안성자에게 「金剛三昧經」(금강삼매경)을 분류할 것을 부탁하여 대안성자가 금강삼매경을 분류한다.

▲ 시정의 다양한 장면
▲ 대안성자가 금강삼매경을 분류하는 장면
원효가 분류된 금강삼매경에 주석을 달았으나 도둑맞고 3일간의 유예기간을 얻어 다시 저술하여 무사히 법회를 열어 왕비의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극적인 긴장감이 유지한 채 표현되어 있다.

▲무사히 법회를 열어 왕비의 병이 나았다.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이 8세기 일본 사회에서 널리 읽혀졌다는 사실은 「續日本記」(속일본기)에서도 확인된다. 헤이안 시대에는 원효를 화엄종의 高祖(고조)로 내세웠을 뿐 아니라, 정토진종의 창시자인 호넨(法然, 1133~1212)도 원효를 화엄종의 祖師(조사)로 기록하고 있어, 8세기 경 정립된 원효의 위상은 13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효에마키>의 존재는 ‘묘에쇼닌’의 신앙에 원효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점과 원효의 삶과 깨달음의 과정을 흥미롭게 전해준다.
불가에서는 석가모니를 일월(日月)로 표현한다. 그런데 ‘묘에쇼닌’은 그의 저서 「勸進記」, (권진기, 1228년)에서 원효를 가르켜 “불법의 동량이며 세계의 日月로 비유되는 고승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월로 비유된 원효
연재를 마치며 귀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이승희 박사(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최상룡 (ksinews@hanmail.net)